타자의 의미는 유리벽 밖에 있다.
타자의 의미는 유리벽 밖에 있다.
‘타자’의 의미는 언제 확인되는가? ‘타자’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예컨대 연인, 친구, 직업, 취미 등등이 타자인 셈이다. ‘너를 사랑해’ ‘너는 소중한 친구야’ ‘나는 내 직업을 사랑해’ ‘독서는 가장 중요한 취미야’ 이처럼, 우리는 타자의 의미에 대해 확신에 차서 말한다. 그런데 정말일까? 우리는 정말 타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타자’의 의미는 그리 쉽게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좋을 때는 다 좋기 때문이다. 삶이 무난하게 돌아갈 때는 타자의 의미를 확인할 수 없다. 어느 대학생이 있다. 그는 여자 친구를 보면 마냥 설레고 좋았다. 그렇다면 그 타자(여자친구)를 사랑하는 것일까? 확언할 수 없다. 그 ‘타자’의 의미는 ‘타자’를 제외한 삶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가 여자 친구를 사랑한다고 믿었을 때, 그의 삶은 무난했다. 학비는 부모가 지원해주었고 학점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의 무난한 삶이 지속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취업 실패로 그의 삶은 궁지에 몰려가고 있었다. 그즈음 그와 여자 친구 사이에 다툼이 잦았던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내심 여자 친구의 모든 것이 못마땅해졌다. 자신보다 유복한 집에서 취업 대신 대학원을 간다는 여자 친구가 못마땅해졌다.
직업도 마찬가지다. 글 쓰는 것이 천직이라 여겼던 이들을 몇 몇 알고 있다. 그들은 ‘타자’의 의미를 확신했다. 하지만 경제적 곤궁함에 몰리자 그들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작가라는 직업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대학생에게 여자 친구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작가라는 직업의 의미가 모두 허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자 친구의 의미가 완전히 사랑이 아니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둘에게 ‘타자’(작가, 여자친구)의 의미가 자신들이 확신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타자’의 의미는 실존적 삶의 곤경과 위기에서 확인된다. 좋을 때는 다 좋으니까. 취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자 친구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그 사랑스러움으로 위안을 받는 이들이 있다. 생활비마저 쫒기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그 씀으로서 위안받는 이들이 있다. 이들 만나 '타자'와 앞선 둘이 만난 '타자'는 분명 다르다. 둘 중 누가 진정한 타자와 만났는지는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삶의 곤경과 위기가 찾아온 날. 그날은 '타자의 의미'를 확인하는 날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타자의 의미. 삶의 곤경과 위기를 외면하고 우회하는 자들이 유아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타자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언제나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니까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타자의 의미’를 알고 있는 자는 성숙하다. 그것이, 삶의 곤경과 위기를 견디며 지나온 자들이 성숙한 이유다. 있는 그대로의 ‘타자의 의미’를 알게 된 자들만 진정한 ‘타자의 의미’를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