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서운해요.”
어느 날 밤, 체육관 관장에게 온 메세지다. 관장은 무엇이 서운했을까? 관장은 정이 많은 사람이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정으로 가르친다. 그 중에서 유독 많은 정을 주었던 제자가 있었다. 가끔은 다른 제자들이 서운해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제자에게 정을 주었다. 그 제자는 무럭무럭 자랐고 한국 챔피언이 되었다. 이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졌다. 그것도 그 제자도 관장도 꼭 이기고 싶어 했던 중요한 시합에서 허망하게 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느껴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간 노력에 대해 보상받지 못했다는 실망과 억울함 때문이었을까? 그 제자는 스승에게 별 말도 없이 체육관을 떠나 버렸다. 그 사이에 관장은 세 번의 감정에 휩싸였다. 미안해했고 서운했고 끝내는 화가 났다. 제자의 패배가 자신의 책임인 것 만 같아 제자에게 미안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작별의 말도 없이 떠나 버린 제자에게 서운했다. 그리고 많은 정을 주었던 소중한 관계가 그리도 허망하게 사라졌음에 화가 났다.
관장도 그리고 그 제자도 이해한다. 그 둘을 모두 이해하기에 가끔 관장에게 말했다. "관장님이 이해하셔야 된다"고. "제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셔야 된다"고. 관장은 그 말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다. 관장에게 야박하게 말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제자는 잘 못이 없고, 관장님이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관장이 더 근사한 스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관장은 그런 근사한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잘해야 '그저 그런 선생', 보통은 '없는 게 더 나은 선생'이 넘쳐난다. '근사한 스승'은 드물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상처 때문이다. 선생도 사람이다.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고 싶다. 큰 사랑을 주면 큰 사랑을 받고 싶다. 세상에 처음부터 제자를 사랑하지 않는 선생은 없다. 어떤 선생이든 처음 어느 제자에게 온 마음을 쏟는다. 하지만 그 사랑이 온전히 되돌아오지 않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바로 그 때가 자신이 어떤 선생이 될지 판가름 나는 시간이다. 주었던 사랑만큼 돌려받지 못한 아픈 상처 앞에서 선생은 세 가지 중 하나의 마음을 선택을 하게 된다. “이제 제자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거야” “이제 적게 사랑해서 적게 상처받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제자를 온 마음으로 사랑할 거야” 첫 번째 마음을 선택하는 이는 ‘없는 게 나은 선생’이 된다. 두 번째 마음을 선택하는 이는 ‘그저 그런 선생’이 된다.
오직 세 번째 마음을 선택하는 이만 비로소 근사한 스승이 된다. 한 사람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스승.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옛말이 있다. 왜 안 그럴까? 아무런 기대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이의 속은 시꺼멓게 썩게 마련이니까. 선생의 똥은 그 속에서 나온 똥이니 개도 안 먹을 수밖에. 관장이 걱정이 되었다. 혹여나 제자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없는 게 더 나은 선생'이 되거나 '그저 그런 선생'이 될까봐.
나의 야박했던 말은, 내가 좋아하는 관장이 근사한 스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사실 그 야박했던 말은 제자에게 상처입어 주춤거리는 나 자신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을 주는 스승이 되었으면 좋겠다. 관장도, 나도. 시간이 더 지나, 머리가 희끗해졌을 때, 둘 모두 근사한 스승으로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똥도, 관장의 똥도 개도 먹지 않는 똥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