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도 칼럼] 내가 떠나 보낸 개새 (上)

붕정만리(鵬程萬里) : 전설 속 거대한 새는 만리를 날아간다.


'원대한 꿈을 향해가는 길은 고단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아빠가 만년필로 정성스레 한글자씩 또박또박 적은 종이를 펼쳤을 때, 나는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있었다. 오랫동안 간절히 꿈꿔왔던 대학생활 그리고 미국이라는 환상을 향해 만리의 여정을 떠나는 나는 무척 긴장되고 두려웠다. 그렇게 뺨에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쳐냈다.


중학교 졸업을 코앞에 둔 겨울 방학 때, 우리 가족은 한달동안 미국 여행을 떠났다. 말이 미국 여행이지 실상은 미국 대학 여행에 가까웠다.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교를 시작으로, 뉴욕, 필라델피아에 이르기까지, 미국 동부의 전통 명문대학들을 쉴새없이 들렀다. 1월달 그 추운 보스턴의 겨울, 수백년 역사의 고풍스런 하버드 대학교. 한 대학생을 보았다.


바삐 걸어가는 중에도 두꺼운 책을 읽는 어느 하버드 대학생.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버렸다. 두꺼운 책이 멋있었고, 그런 책에 얼굴을 파묻고 걸어가는 뿔테안경의 지적인 모습이 멋있었다. 그런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 생활을 하려면 그런 멋진 곳에서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난 속으로 다짐했다. 나중에 대학 생활은 꼭 미국에서 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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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미국 대학을 가겠어' 미국 여행을 다녀온 후 엄마아빠에게 통보했다. 7막 7장의 홍정욱처럼 미국 고등학교는 못가더라도, 대학만큼은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아빠는 잘 생각했다고 했다. 사나이는 큰 꿈을 가져야하고 부모인 자기들은 내가 꿈을 이루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엄마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그 지원의 제한이 없었다.


학원을 다니겠다고 하면 돈을 줬고, 내가 필요하다면 좋은 노트북도, 비싼 과외선생도 붙여줬다. 그리고 말도 안되게 비싼 미국 사립 대학을 가겠다고 했더니 그것 마저도 흔쾌히 오케이였다. 진짜 내가 미국대학에 덜컥 붙었을 때 분명 비싼 학비에 겁도 났을 거다.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미국 지방 대학들을 집어치우고, 더 좋고 더 비싸고 더 이름있는 학교, 세상의 중심에 있는 학교를 가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학교 유학반을 찾아갔고, 미국 대학 준비를 시작했다. 내신도 잘 봐야하고 미국 수능도 잘 봐야하는데 거기다가 동아리, 봉사 활동, 수상 같은 것도 중요해서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영어는 이미 그 수준을 넘어버려서 영어 시간에는 영어책 아래에 미국 수능 준비서를 펼쳐놓고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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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목들은 내신 관리를 또 잘 해야해서 나름대로 계속 공부를 해야했다. 수능 모의고사를 치는 날이면 하루종일 학교 도서관에 처박혀서 자체적으로 미국 수능 모의고사를 봤다. 방학이 되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미국 수능 학원을 다녔다. 잠은 고시원에서 최소한의 시간만 자고 낮에는 학원에서, 저녁에는 고시원에서 공부했다.


나는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다녔다. 많은 놈들이 서로 연애도 하고 난리였는데, 나는 3년내내 연애를 안했다. 할 줄도 몰랐고. 왜냐하면 나는 걔들처럼 그저 그렇게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멋지게 증명해보이고 싶었거든. 그래서 참았다. 공부하기 싫은 것도 참았고, 한국 대학 가면 편할 텐데라는 내 안의 타협도 참았고, 학교 선생들의, 친구들의 이해할 수 없다는 그 일그러진 표정도 꾹 참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버텼다. 저녁 10시 야자가 끝나고 집 근처 독서실에 도착하면 10시 45분. 맥심 커피 한잔과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를 지나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 시작될 때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6시 15분 기상 후 학교에 도착하면 오전 7시. 그 높은 언덕길을 올라 다시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버티고 참으면 찬란한 미래가 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한 번의 날개 짓으로 구만리를 날아가는 붕鵬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정도

- 철학흥신소 비밀 요원.

- 무려 NYU출신 (하지만 현재 당근 관련 일을 하고 있음)

-누구보다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음(하지만 현재 상태, "삐뚤어 질 테다!")

- 자본주의와 인문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

- 오토바이타고 세계일주 했음(하지만 변한 건 딱히 없음)

- 아내를 우울증에서 건져내고 이제 본인 차례 (하지만 이제 아내가 건져주는 중)

- 요즘 철학 배우고 환골탈태 중. (하지만 살은 안 빠짐)

- 사람을 사랑할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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