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도 칼럼] 내가 떠나 보낸 개새 (下)

어둠과 낮음을 아프게 직면하는 자만이 힘을 얻는다.


버티고 참으며 도착했다. 붕鵬이 될 둥지. NYU. 대학교 1학년,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이제 뭘해야 하나, 무슨 전공을 해야하나 고민했다. 아빠는 뭘해야 할 지 잘 모르겠으면 경제를 공부하라고 권했다. 우리 국민들이 경제를 몰라서 IMF도 터졌다고 했다. 그래서 경제를 배워 투자은행을 가도 좋고, 대학원을 가도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따랐다.


경제학 공부는 좆같았다. 온국민이 다 아는 수요와 공급 그래프를 그리고 그 넓이 계산이나 해대는 거시경제 입문을 지나 중급 경제로 진도를 빼다보니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헛짓거리인지 알게되었다. 그래프 속 선과 선이 만드는 공간 속에도, 이자율과 환율 관계 속에도 사람 따위는 없었다. 그냥 공식과 조건 밖에 없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애초에 잘 꾸며진 실험실 안에 변수를 바꿔가면서 그 영향을 비교하는,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그 어떠한 가치를 주지 않는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방황이 시작되었다.


스탠리 큐브릭과 마틴 스코세시 작품을 다루는 미국 1970-80년대 영화 수업을 좋아했다. 성경부터 니체까지 이어지는 서양 철학 교양 수업도 어려웠지만 즐거웠다. 한국 근현대사를 해부하는 역사 수업도 경제학 수업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를 느꼈었다. 3학년 말에 재미로 듣기 시작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에서는 왜 이걸 이제서야 시작했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당연히 성적도 경제학과는 비교가 안되게 좋았다. 3학년 말에 전공을 바꿔버리기엔 겁이 나서 프로그래밍은 부전공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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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경제학에서 말아 먹는 바람에 학점은 개판이었다. 전설 속 새, 붕鵬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학점을 유지하는게 필수라 여겼다. (붕은 일단 학점이 일단 좋아야한다.) 이미 전설 속 새가 되긴 힘들겠다고 깊이 괴로워하기도 했었다. 지금보니, 오랫동안 꿈꿨던 전설의 새는 붕이 아니라 븅신이었다. 불만없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부모님이 하라는대로 경제학 공부하고, 학점도 좋아서 투자은행을 갈지 대학원을 갈지 선택할 수 있고, 비싼 차에 비싼 양복에 존나 이쁜 여자들 마음대로 후릴 수 있고, 친구들한테 인기도 많은데 돈도 개 잘 버는 전설 속 새.


붕. 개새. 그런 새가 되고 싶었다는게, 내가 오래도록 꿈꿨다는 전설이란게 고작 그 따위였다는 자각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 겁만 많고 무비판적이었던 나였구나. 세상사람들의 욕망에 기어들어가 숨어서 안도하고 싶었던 나는 무책임했구나. 붕의 욕망은 비록 부모가 심었다하더라도 나는 붕을 거부할 수 있었다. 분명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붕이라는 그럴싸한 이미지 뒤에 숨은 세속적인, 바보 같은, 비인간적인 욕망을 움켜 쥐고 있었던 건 나다.


붕은 최소한 고상할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국 대학 가는 비행기 안에서 눈물 짜던 내가 꿈꾸던 새는 과연 전설 속의 그 새가 아니었구나. 세속적 성공을 이룬 세속적인 비지니스맨의 모습이었을 뿐. 아.. 씨발! 지난 20년간 날 가둬두고 괴롭혔던 붕에게 이제는 이별을 고해야겠다. 그의 실체를 알았으니 이제 붕은 더 이상 전설 속 새가 아니다. 전설 속 새가 아니기 때문에 만리를 날아갈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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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에 갖혀 책상에 엎드려 이마가 벌개지도록 자다가 새벽 2시가 다되었다는 사실에 놀라 집으로 달려갈 필요도 없다.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갖혀 졸린 눈을 부비며 미국 수능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만리를 떠나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필요도, 이유도 없다. 다른 인간이 만들어놓은 하찮은 세속적 성공을 향해 온 몸바쳐 뛰쳐갈 일도 없다. 지금 이곳의 사소한 행복을, 즐거움을 꾹꾹 참아내며 고통의 심연 속으로 잠영한 채 이렇게 조금만 견디면 더 좋은 날이 올 거라며 위안, 아니 자기기만 할 일도 없다. 거짓된 세속적 욕망을 심어주었다는 이유로 부모를 원망할 일도 없고, 과거를 회한할 일도,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 할 일도 없을 거다.


20년전 부모는 나를 전설 속 새 등 뒤에 태웠다. 그리고 오늘 나는 전설 속 새를 죽였다. 드디어.





이정도

- 철학흥신소 비밀 요원.

- 무려 NYU출신 (하지만 현재 당근 관련 일을 하고 있음)

-누구보다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음(하지만 현재 상태, "삐뚤어 질 테다!")

- 자본주의와 인문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

- 오토바이타고 세계일주 했음(하지만 변한 건 딱히 없음)

- 아내를 우울증에서 건져내고 이제 본인 차례 (하지만 이제 아내가 건져주는 중)

- 요즘 철학 배우고 환골탈태 중. (하지만 살은 안 빠짐)

- 사람을 사랑할 준비 중.

- 어둠과 낮음을 정직하게 직면 중(졸라 아프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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