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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듦과 성찰

십여 년 전, ‘행복전도사’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강사가 있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희망과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 그가 자살을 했다.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왜 자살을 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종종 그가 생각났다. 그건 아마 나 역시 사람들 앞에서 떠드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테다.      


 그가 대중 앞에서 서는 직업이 아니었다면 자살하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대중 앞에서 떠듦으로서 그의 마음이 더 공허해져갔을 거란 사실만은 어림으로 짐작할 수 있다. 떠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을 갉아 먹어 조금씩 자신을 죽여갈 수도 있는 일인 까닭이다.      


 ‘떠듦’과 ‘성찰’이 균형을 잃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삶이 공허해지는 순간이고, 그 순간이 계속되면 조금씩 죽어가게 된다. 나는 조금씩 공허해지고 조금씩 죽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무거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진심을 가볍게 떠들었다. 감정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동네 어른과 욕짓거리를 하며 다투었다. 그것은 떠듦에 취해 떠들었던 결과다. 부끄러운 일이 이 뿐이랴. 떠듦과 성찰이 균형이 잃을 때는 언제나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떠듦은 비움이고, 성찰은 채움이다. 채우지 않고 떠드는 사람은 비게 된다. 그 빈자리에 공허와 허무가 들어차게 된다. 그 공허와 허무를 손쉽게 메우려 다시 떠들 때 죽어간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죽어간다.  떠들 자격이 없는 자가 떠들고 있다는 자각에게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시 떠들 때, 떠드는 자는 죽어 간다. 아니 이미 죽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껄임에 취해 지껄이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이니까.


 어찌 모를까. 비우고 채우는 것과 채우고 비우는 것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떠들기 위해 성찰도 필요하고, 성찰하기 위해 떠듦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성찰한 만큼 떠들고 싶다. 그리고 만약 떠들었다면 그만큼 아프게 성찰하고 싶다. 떠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나로서, 가득 찬 채로 사는 것은 이미 물건너 간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텅 빈 채로 죽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텅 빈채로 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다. 나는 ‘행복전도사’처럼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가득 찬 채로 죽고 싶다.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은 그저 닥치고 있어야 할 때임을 알 수 있는 성찰 정도는 남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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