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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

자기중심을 갖는 것은 좋은 것일까? 그렇다. 늘 흔들리는 삶은 불안하니까. 자기중심을 잡지 못해 흔들리는 사람들이 가끔 나를 찾아온다. 그들에게 자기중심을 갖게 해주려고 애를 쓴다. 불안한 삶을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이는 여전히 자기중심을 갖지 못하고, 또 어떤 이는 자기중심을 갖게 된다. 전자를 바라보는 감정은 안쓰러움이고, 후자는 안타까움이다. 자기중심을 갖지 못한 이들은 흔들리는 그래서 불안한 삶이 지속되기에 안쓰럽다.


 그런데 후자는 왜 안타까움인가? 자기중심을 갖게 되었으면 좋은 것 아닌가. 아니다. 섣불리 갖게 된 자기중심은 ‘자기만 중심’이 된다. 그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듣지(흔들리지) 않거나, 듣더라도 ‘자기만의 중심’으로 해석하며 그것이 옳다고 는다. 흔들리지 않는 삶을 벗어났지만 자기만의 세계의 갇힌 셈이다. 말하자면, 사춘기를 벗어나기 위해 꼰대 노인이 되어버린 꼴이다. 그런 모습을 지켜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어찌 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흔들리기에 불안한 사춘기. 자기만의 중심 가진 확신에 찬 노인. 이 양극단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진정한 자기중심은 '흔들림'도 아니지만 '고정점'도 아니다. 그것은 '떨림'이다. 손가락으로 책받침을 돌려 본적이 있을까? 그때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 중심이 너무 크게 흔들리거나 혹은 고정된 점이 될 때 책받침은 떨어진다. 미묘하게 떨림으로 중심을 잡아야 책받침을 계속 돌릴 수 있다.  

   

 흔들리는 이는 자기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자기중심은 타자의 이야기에 떨리기(공명!) 위한 중심이다. 성숙은 ‘흔들림’(요동)의 범위를 줄여 ‘떨림’으로 나아간다는 것일 테다. 결코 어떤 고정점에 정박해서 흔들림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숙이 아니라 미성숙이다. 성숙이라는 그럴듯한 화장을 한 미성숙. 두 가지 미성숙이 있는 셈이다. 불안이라는 미성숙과 확신이라는 미성숙. 전자는 안쓰럽고, 후자는 안타깝다.  

    

 자기중심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타인과 함께 떨리기 위함이다. 성숙하려는 이들 중에 꼰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는 흔하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자기중심을 잡으려는 이가 너무나 많기 때문일 테다.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아닌 ‘타인’을 위해 자기중심을 잡으려는 이들만 진정한 자기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스스로 아프게 물어볼 일이다. 나의 중심은 누구를 위한 중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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