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규어부터 전자제품, 옷 등등 이것저것 사다 모으는 사람을 안다. 그는 마음에 드는 것은 사서 자신의 집에 가져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소유욕이다. 소유욕이 강한 그는 마음이 끌리는 것은 뭐든 가지려고 하고 또 자신이 그렇게 가진 것을 결코 내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 그렇게 게걸스럽게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삶을 지속했을까? 아니다. 게걸스럽게 소유하려는 마음이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
“너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 가” 그는 언젠가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유물들을 하나씩 주려고 했다. 소유욕이 정점을 찍으면 안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애지중지 모았던 그 물건들을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제 그는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었을까? 짓궂은 나는 장난끼가 발동했다. “나 저거 주라!” 구석에 있는 이제는 빛바랜 건담 피규어를 달라고 했다.
그 건담 피규어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선물해주신 거였다. 그래서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달라고 했다. “그건 안 돼” 당황한 듯, 조금 화가 난 듯 말했다. 그는 왜 그리 게걸스럽게 물건들을 소유하려 했을까? ‘필요’가 아니라 ‘안정’을 위해서였다. 하나씩 물건을 사, 가득 찬 물건들을 보며 정서적 안정을 느꼈기에 그리도 물건들을 사다 모았던 것이다.
그가 사다 모았던 그 많은 물건들은 또 다른 ‘건담’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남긴 정서적 불안정을 ‘건담’이 채워주고 있었다. 그 빈자리(불안)을 더 채우고 싶어 또 다른 ‘건담’을 들을 그리도 사다 모았던 게다. 하지만 이제 그는 물건들을 나눠주고 있다. 물건들을 소유할수록 마음이 공허해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소유욕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그는 ‘안전빵’만은 끝끝내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항상 ‘안전빵’이 있다. 그에게 그 ‘안전빵’은 ‘건담’이다. 다른 것은 다 버릴 수 있어도, ‘안정빵’만은 안 된다. 그것이 없으면, 불안에 잠식당할 것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정서적 불안정은 소유욕을 낳는다. 하지만 소유욕의 충족은 정서적 안정이 아니라 공허를 낳는다. 그것을 깨닫는 이들은 소유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끝끝내 놓지 못한 ‘안전빵’이 남아 있다면,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놓지 못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내면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우지 못했으니까.
그 친구는 언제 정서적 불안정과 이별할 수 있을까? 간명하다. '건담'마저 내어줄 수 있을 때다. 그날이 비로소 의지했던 아버지를 떠나 보내는 날일 테다. 온전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안전빵' 마저 내려놓는 것이다. 그 ‘안정빵’ 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정서적 불안정과 온전히 이별할 수 있다. 아직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우리가 선뜩 '안전빵'을 내려놓을 순 없을 테다. 하지만 적어도 아프게 물을 수는 있어야 한다. “나에게 안전빵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