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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되기

“모든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인종적 또는 그 밖의 대립은 그것이 실제로 인간을 적과 동지로 분류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변화하게 된다.” 칼 슈미트     


‘정치는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시작된다.’ 칼 슈미트의 말이다. 냉정하고 정확한 진단이다. 정치는 언제나 파벌로부터 시작되니까 말이다. ‘정치’의 반대쪽에 ‘사랑’이 있다. '정치'를 통해 '사랑'을 알 수 있다. '정치'의 시작이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면, '사랑'은 적과 동지의 구분 없음이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사랑의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모두의 동지가 되거나, 모두의 적이 되거나. 인문주의자로서의 사랑은 둘 중에 하나의 길 밖에 없다. 내 아이·부모·연인만큼 다른 사람을 좋아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만큼 내 아이·부모·연인을 싫어하거나. 사실 그 두 길은 하나의 길이다. 모두의 적이 되었기에 모두의 동지가 될 수 있고, 모두의 동지가 되었기에 모두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편을 가를  생각이 없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만드는 파벌만 파벌이 아니다. 어떤 파벌은 만들어진다. 결혼을 해서 소중했던 친구들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는 쉽게 말한다. “나는 너희들이 싫어진 게 아니야! 결혼을 해서 그래.” 이것이 만들어지는 파벌의 논리다. 배타적 관계를 통한 유대감은 필연적으로 파벌을 만든다. 아니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벌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방아쇠를 당겼을 뿐 죽인 것은 총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파벌 안에서 인문주의자는 어떻게 사랑해야하는가? 파벌은 반드시 배제를 만든다. 편 가르기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외된 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문주의적 사랑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미 만들어진 파벌 안에도 사랑이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다. 편을 갈라 내 것을 챙기려는 정치. 


 인문주의적 사랑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의 문제다. 나는 알고 있다. 인문주의적 사랑 끝에는 혼자가 될 것임을. 진정한 사랑은, 모두의 동지가 되고, 모두의 적이 되는 그 위험한 횡단을 계속하는 일이니까.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에 머물려는 이유일 테다.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는 그 수가 적더라도 늘 내 편이 있으니까. 그래서 끝끝내 혼자가 될 일은 없으니까.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편을 가르는 배타적 사랑에 목을 매는 이유겠지.


 의도한 혹은 의도하지 않은 파벌이 익숙한 세상이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것이 익숙한 세상에서, 인문주의적 사랑은 ‘홀로-되기’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나 역시 ‘홀로-되기’가 두렵다. 나의 ‘홀로-되기’가 누군가에게 슬픔이 될 것은 더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로 모두의 친구가 되고 때로 모두의 적이 될 테다. 그렇게 편과 편 사이에서 소외된 자들 곁에 있어 줄테다. 끝내 홀로 된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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