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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진실되지 않다.

무사는 칼 뒤가 아니라 칼 앞에 서야 하고,  작가는 글 뒤가 아니라 글 앞에 서야 한다. 철학자는 철학 뒤가 아니라 철학 앞에 서야 한다. 황진규


파르헤시아parrhesia.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년에 접어들어 강조했던 말이다. 파르헤시아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삶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진실을 말할 때, 오직 자신이기에 살 수 있는 단독적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독적 삶의 긍정. 그것이 파르헤시아가 중요한 이유다. 

     

 푸코가 삶의 끝자락에서 왜 파르헤시아를 강조했는지 알 것도 같다. 동성애자로서 고단하고 아픈 삶 겪어낸 푸코 아니었던가. 그에게 ‘파르헤지아’가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단독적 삶을 긍정할 수 있단 말인가.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를 파헤쳤던 젊은 날의 푸코는, 삶의 끝자락에 들어서 깨달았던 게다. 그 모든 사회적 구조를 파헤쳐서 폭로를 하더라도, 파르헤시아가 없다면, 끝끝내 단독적 삶의 실현과 긍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파르헤시아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수단이다. 단독적 삶의 긍정을 위한 수단. 목적과 수단을 헷갈릴 때 우리는 여지없이 헛발질을 하게 된다. 진실을 말하는 정직함은 중요하다. 하지만 정직함 그 자체를 목적 삼을 때, 우리는 그 뒤에 숨어 크고 작은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나의 정치적 지향은 (‘무체계주의’가 아니라, ‘무중심주의’로서의)‘아나키스트’다. 이것을 정직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나의 파르헤시아는 늘 의미가 있는가?


  

 아니다. 그것이 단독적인 삶을 긍정하는 방향일 때만 그렇다. 미래한국당 모임에서 “나는 아나키스트다”라고 말하는 파르헤시아는 의미 있다. 그들 앞에서 파르헤시아는 고되고 힘든 일이다. 그들에게 ‘아나키스트=테러리스트’니까. 그들 앞에서 파르헤시아는 더 고되고 더 힘든 일이기에 나의 단독적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만큼이나 진보적인 사람들 앞에서 혹은 아직 정치적 당파성이 없는 이들 앞에서 나의 파르헤지아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질까?


 물론 그것 역시 파르헤시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진실을 말했으니까. 하지만 그 파르헤시아는 나의 단독적 삶을 긍정하게 하는 파르헤시아는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약한 자신을 향한 셀프 칭찬, 위로, 격려에 가까우니까. 파르헤시아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파르헤시아가 어떤 파르헤시아인지 성찰해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 때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더 힘들고 더 아픈 파르헤시아를 선택하는 것인가? 아니면 덜 힘들고 덜 아픈 파르헤시아를 선택하는 것인가?

    

 전자는 자신의 단독적 삶을 긍정하는 파르헤시아일 테고, 후자는 나약한 자신을 위한 칭찬·위로·격려하기 위한 파르헤시아일 테다. 아픈 삶의 진실이 있다. 진실은 때로 진실되지 않다. 우리는 때로 진실 뒤에 숨는다. 감당하기 싫은 삶을 숨기려 진실을 말하며 진실 뒤에 숨는다. 이것이 우리가 ‘철학’ 뒤가 아니라 ‘철학’ 앞에 서 있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파르헤시아 뒤에 서 있지 않을 테다. 그 앞에서 서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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