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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라는 거대한 레토릭

 "예수 믿으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천국간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기독교 구원으로 알고 있죠. 하지만 이건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와 이단에서 사용하는 수준의 논리라고 생각해요. 제가 교회를 뛰쳐나와 방황하다 배운 구원론은 달랐습니다. 그 구원론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은 우리 안에서 '이미' 이뤄졌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미묘한 혹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이 "이미"이뤄졌다'에서 머무는 사람은 일주일동안 개차반으로 살다가 일요일에 교회와서 회개하면 그걸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후자를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구원을 바라보며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이 둘은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현격하하게 다른 사람이 됩니다. - 교회 밖의 어느 그리스도인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의 건강함은 중요하다. 그것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아직'의 구분은 건강한 '종교주의자'의 통찰이죠. 구원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기에 '지금' 다시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건강한 교인이죠. 하지만 '인문주의자'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해요.


 종교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레토릭인 것은 아닐까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레토릭. '아직' 이뤄지지 않은 구원을 위해,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논의는 분명 건강하죠. 하지만 그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죠. '이미'와 '아직' 사이의 구원론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 논의는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자기(인간)부정의 무의식적 토대 위에서만 성립하고, 동시에 그 토대를 더욱 공고히 하죠. 예수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니까요. 


 저는 종교가 거대한 레토릭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대한 레토릭. 저는 '신'은 믿지 않지만 그 '선'한 의도는 믿어요. 어쩔 수 없이 '악'한 인간들을 '선'하게 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 레토릭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그 레토릭의 '선'한 의도와 상관없이, 그 레토릭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가설 위에서 세워진 레토릭임을 이야기해야 해요. 그것이 인문주의자에게 주어진 역할일 거예요.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죠.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긍정될 때, 종교라는 거대한 레토릭은 붕괴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레토릭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것이 인문주의자가 신의 존재를 믿기 전에,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해야 하는  이유일 겁니다. 스피노자는 중요합니다. 스피노자는 서양의 역사에서 종교라는 거대한 레토릭을 붕괴하고, 공고했던 그 레토릭을 새로운 레토릭으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던 최초의 인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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