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가해자의 서사'는 필요하다.

‘가해자의 서사’ 없이 가해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원구’는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였다. 우리는 ‘원구’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때 누군가 말한다. ‘원구’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졌고, 고아원에서는 학대를 받았고, 이른 나이부터 일을 하느라 어른들에게 착취를 당했다. 이것이 전형적인 ‘가해자의 서사’narrative다. 우리는 ‘원구’만큼이나 '원구'의 서사를 말하는 이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 분노의 정체는 무엇인가? 분노가 옅어지게 만드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래서? 지금 ‘원구’를 이해하라는 거야?”      


 ‘원구’의 서사를 듣다보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얼마만큼의 이해를 하게 된다. 그 이해는 '원구'를 바라보는 이들의 분노의 감정을 수그러들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원구'를 이해하는 이도, '원구'의 서사를 말하려는 이에게도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다시 묻자. 우리는 ‘원구’의 서사를 말하는 이에게 왜 분노하는가? 그것이 정당한 공분公憤을 희석시키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해’와 ‘용서’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구’를 ‘이해한다’는 것과 '원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이해할 수 없어도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이해할 수 있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원구’의 범죄는 후자에 해당할 테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은 묻는다. 이해와 용서가 상관없는 것이라면, 달리 말해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왜 굳이 이해해야 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다.


 가해자의 서사를 이해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아니다. 가해자의 서사는 필요하다. 그것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원구’의 처벌 그 자체인가? 악마화된 ‘원구’만 사회로부터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원구’의 제거로 해결되는 것은 우리의 분노와 복수심뿐이다. ‘원구’의 처벌의 근본적인 이유는 또 다른 ‘원구’가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원구’에게 돌릴 때 마음 속 깊은 곳의 분노와 복수심은 잠시 해소되겠지만, 또 다른 잠재적 ‘원구’들은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이 가해자의 서사가 필요한 이유다.      


 물론 ‘가해자의 서사’가 ‘피해자의 서사’보다 앞서거나 커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이다. 그것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다고 표방하는 이들이라면, 가해자의 서사를 모조리 부정하거나 덮어두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책임이다. 가해자의 서사를 부정하고 덮어둘 때, ‘원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한나 아렌트를 기억하라! 유태인인 그녀는 유태인을 학살했던 아이히만을 악마로 보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죄는 ‘무사유’라고, 악은 평범하다고 말했다. 이는 그녀가 아이히만의 서사를 아프게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이른 결론이었을 테다. 이후 아렌트가 그저 분노와 복수심에 빠져 있던 동료 유태인들에게 수많은 상처를 입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테다.      


 아이히만을 악마로 여기며 단순히 제거하려고 했던 유태인들과 사유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아이히만될 수 있다고 말한 아렌트. 둘 중 누가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더 큰 기여를 한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보아야 할 질문이다. 가해자의 서사를 이해하는 일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이 없다면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가해자의 서사’ 없이 가해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피딱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