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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2002)

“평균 이하 존재들의 평균 이상의 사랑”

오아시스(2002), 이창동

*이창동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작가주의 감독이다. 

*이창동은 국어교사, 소설가, 각본가를 거쳐 마흔이 넘어 영화감독이 되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소설 <전리>가 당선되어 등단. 1992년,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수상. 1996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 수상. 이후,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  





“평균 이하 존재들의 평균 이상의 사랑”     


1. 

「오아시스」 우리에게 묻는다. “평균 밖의 존재들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겠니?” ‘홍종두’와 ‘한공주’도 평균 밖의 존재들이다. 평균 밖의 존재들은 이질적인 것들이다. 그네들이 평균 밖인, 이질적인 이유는 그네들의 동물성 때문이다. 우리는 ‘홍종두’에게서 정신적 동물성을, ‘한공주’에게서는 육체적 동물성을 본다.      


 ‘홍종두’는 인간의 평균적 육체를 가졌지만 정신은 평균치를 벗어나서 동물적이다. ‘종두’는 동물적이다. 한 겨울에 반팔을 입고도 대수롭지 않다. 돈이 없어도 일단 삼겹살을 먹고 본다. 그뿐인가? 강간 미수, 폭행으로 감옥에 다녀왔고, 사회로 돌아와서도 동물적인 본능을 채우는데 급급하다. ‘한공주’는 반대다. 홍경래가 장군이 아니라, 반역자라는 사실을 ‘종두’에게 가르쳐줄 만큼 정신적으로는 평균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의 움직임은 평균적이지 못하다. 그녀의 육체적 움직임은 동물적이다. 육체를 통해 나오는 그녀의 말소리는 여느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동물적이다.      


 묻자. 평균 밖의 존재들, 이질적인 존재들은 비정상인가? 아니다. 그들은 평균적이지 않을 뿐, 우리와 다르지 않다. 단지 불행히도, 그네들에게 더 큰 불행이 조금 일찍 찾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종두’(사회부적응자)와 ‘공주’(장애인)의 이질성은 너무 쉽게,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누가 그네들을 비정상으로 만들었을까? 평균의 안의 존재들의 시선이다. ‘종두’가 처음 공주를 만나러 갔을 때, 하얀 비둘기가 ‘공주’의 ‘노랫소리’에 맞춰 날아다닌다. 그런데 타자(종두)의 시선이 닿자, 비둘기는 사라지고 공주의 ‘동물소리’가 들린다. 공주의 노랫소리를 동물소리로 만든 것은 우리의 시선이다.   

   

 그뿐인가? 혼자 사는 ‘한공주’는 옆집 부부가 돌봐준다. 그 옆 집 부부는 한공주가 보고 있는데서 섹스를 한다. 좁아터진 집이기에 마땅히 섹스를 할 곳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부부는 ‘한공주’를 인간으로 정확히는 인격체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보고 있는데 어떻게 발가벗고 섹스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부부에게 한공주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공주의 육체는 분명 이질적이다. 하지만 그 이질성을 비정상 아니 비인격체로 만든 것은 그 부부의 시선이다.      


 우리는 달랐을까? 평균적이지 않기에 이질적인 사람들, 예컨대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 크고 작은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 외국인 노동자들, 난민들. 혹은 동성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이들을 바라보았던 시선은 한공주의 옆 집 부부의 그것과 달랐을까? 달랐다면 무엇이 얼마나 달랐던 걸까? 아니, 우리는 그네들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했을까? 불편하고 불쾌한 것들을 없는 것처럼 여겼던 것은 우리의 오랜 습관 아니었던가.      



2. 

「오아시스」는 사랑 영화다. 사랑 영화이기에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내적 시선의 분열에서 온다. 영화 초반, 우리가 ‘홍종두’와 ‘한공주’를 이해할 수 없던 때 그들의 사랑도 이해할 수 없다. ‘한공주’를 겁탈하려는 ‘홍종두’의 마음을 어떻게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홍종두’와 ‘한공주’를 이해하게 된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하는 법도 몰랐던 순수하고 순진했던 한 남자를 알게 된다. 또 혼자 남겨진 외로움과 두려움에 간절히 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여자를 알게 된다. 그렇게 간절히 사랑하고 싶고, 또 사랑받고 싶었던 두 사람을 본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종두’와 ‘공주’를 본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종두’와 ‘공주’가 만들어내는, 물고 빨고 다투고 화해하는 평균 밖의 이질적 존재들의 첫사랑에서 우리의 사랑이 겹쳐지나 간다. 이제 우리는 이질적인 것에서 ‘나’를 볼 수밖에 없다. 이질적인 것은 ‘나’와 다르기에 불편한 것, 없어도 상관없는 것, 없었으면 좋을 것 아니던가. 하지만 바로 그 시선이 ‘나’를 보는 시선이 되어버린다. ‘홍종두’와 ‘한공주’의 로맨스에서 빙긋이 웃음 지을 때 ‘나’의 내적 시선은 이미 분열되기 시작했다.     


 「오아시스」는 선택을 강요했다. 이질적인 것을 ‘나’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나’를 이질적인 것으로 대할 것인가? ‘홍종두’와 ‘한공주’를 그리고 그네들의 사랑을 이해해버린, 아니 그네들 속에서 ‘나’를 발견해버렸기에, ‘나’는 이 강요된 선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안다. ‘나’를 이질적인 것으로 대할 때 결과는 끔찍하다. 그때는 ‘나’ 자신을 불편한 것, 없어도 상관없는 것, 없었으면 좋을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 끔찍한 자기부정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이질적인 것을 ‘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나’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이 사실은 ‘나’와 다르지 않았음을 이해하고 싶다. 이질적인 것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싶다. 그렇게 나는 ‘홍종두’가 되고 싶다. 그렇게 나는 ‘한공주’와 사랑하고 싶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내가 그리도 찾아 헤매던 ‘오아시스’가 펼쳐질 것이란 사실을 이미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오아시스는 없다. ‘우리’의 오아시스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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