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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돼지(Crimson Pig, 1992)

“우리의 ‘비행’은 무엇인가?”

붉은 돼지(Crimson Pig, 1992), 미야자키 하야오

*마야자키 하야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매이션 감독. 그의 작품은 아이와 어른이 모두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만화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철학사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그의 좌파적 성향이 그의 작품 속에서 무정부주의적 색채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1941년생인 하야오는 전형적인 맑스주의의 물결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맑스주의를 넘어 아나키즘의 가능성을 엿보러했다.      





“우리의 ‘비행’은 무엇인가?”

1.

포르코는 돼지다. 탐욕적이며 게으르고 무기력한 돼지. 현상금 사냥꾼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어느 섬에 드러누워 술을 마시며 게으름을 피운다. 그뿐인가 사랑하는 이를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무기력하다. 그에게서는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의 냄새가 난다. 포르코는 왜 돼지가 되었을까? ‘포르코’는 한때 ‘마르코’였다. 이탈리아의 유능한 공군 파이럿인 마르코. 마르코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죽여야 하는 적들과 죽어가는 동료들의 끝없는 행렬이 만들어내는 은하수를 본다. 그리고 그 은하수에 끼지 못한 자신을 본다.      


 마르코는 전쟁이라는 것, 파시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깨닫는다. 그 모든 것을 깨닫고도 은하수가 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스스로 '돼지'가 되기를 선택한 것일 테다.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어서. 그렇게 마르코는 혐오감을 자아내는 '돼지'로 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마르코가 포르코(돼지)가 된 것은 오롯이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다. 돼지로 사는 것만이 최소한의 인간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포르코는 돼지이면서 (무체계주의가 아닌 무중심주의로서)아나키스트다. 아니 돼지이기에 아나키스트다. 애국채권을 사서 국가에 이바지 하라는 은행원에 말에, 포르코는 답한다. “그딴 건 인간들끼리 많이 하시오!”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인 편이 나아!” “돼지에겐 나라도 법도 없어!” 당당하게 말하는 포르코 돼지이기에 아나키스트다. ‘돼지’(포르코)와 달리, ‘인간’(마르코)은 성실하며 열정적으로 신념을 지킨다. 그것은 국가주의(전쟁, 파시즘) 안에서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열정적이고 성실한 이들은 국가주의 안에서 괴물이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 국가주의라면 인간답게 사는 유일한 방법은 ‘돼지’로 사는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국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냈던 철학자, 양주가 말하지 않았던가. ‘위아爲我’ 털 하나를 뽑아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저 자신我을 위하여爲 살라고 말이다. 포르코는 그렇게 돼지(아나키스트)로서 인간다움을 지켜나간다. 하지만 돼지는 인간이 아니기에 또 다시 인간답게 살 수 없게 된다. 포르코의 깊은 쓸쓸함은 이 모순 안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리라는 서러운 직감이겠지.          


2.

잔혹한 시간이 다가 온다. 삶의 진실에 직면하게 하게 될 때다. 내 나름으로 열심히 산다(돈벌이)고 살았지만, 사실 그것은 나 자신을, 주변 사람을 더 나아가 세상을 해롭게 하는 일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1차 세계 대전을 호령했던 이탈리아의 파이럿 마르코처럼. 그때 우리는 극심한 삶의 무의미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삶이 펼쳐진다. 첫째, 비어버린 삶을 감당할 수 없어 극단으로 향한다. 더 잔혹한 국가주의자(자본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 국가주의자들을 없애버린 더욱더 더 잔혹한 테러리스트(얼치기 인문주의자)가 되거나.      


 두 번째 삶도 있다.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가 된다. 이는 대체로 영민한 이들의 귀착점이다. 국가주의자도 테러리스트도 결국 다 똑같은 놈들 아닌가. 다들 저마다 알량한 이념에 따른 신념을 지키려 누군가를 해치는 이들 아닌가. 그래서 영민한 이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무의미로 가득한 삶에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마저 가득 채워 완전히 텅 비어버린 삶을 마주하게 된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삶. 어떻게 해야 할까?     

 

 포르코에게 남은 하나의 기쁨이 있다. 비행이다. 돼지이지만 비행만은 놓지 않는다. 포르코는 그냥 돼지가 아니다. 나는 돼지다. 사랑하는 이와의 통화에서 포르코는 말한다.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포르코는 공군(국가주의)이기를 포기했다. 동시에 공군(국가주의)과 맞서 싸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비행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장 아픈 기억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자신의 기쁨을 지켜내는 삶을 산다. 포르코는 완전히 텅 비어버리지 않았다. 인간적 따뜻함이 남아 있다. 비행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포르코에게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비행을 놓지 않는다면, 그에게 남겨진 인간적 따뜻함으로 다음 세상을 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가주의자도 테러리스트도, 허무주의자도 염세주의자도 아닌 자들의 세상. 모두가 돼지인 더 인간다운 세상, 그래서 더 아름다운 세상.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세상의 시작은 ‘비행’이라는 사실이다. ‘돼지’가 될 수 있는 여러분의 ‘비행’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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