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살 용기가 있는가?”
밀리언달러베이비(Million Dollar Baby, 2004)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이스트우드 : 미국의 영화배우, 정치인, 음악가 및 감독.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배우로서 명성을 쌓았다. 세르지오 레오네(이탈리아 감독)에 영향을 받아, 1970년대부터 영화감독 활동을 시작. 이후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거장이다. 캘리포니아주 카멜시의 시장을 지냈었다. 《체인질링》, 《밀리언 달러 베이비》, 《미스틱 리버》 등의 음악을 직접 작곡했다.
조지 크루니, 벤 애플렉, 베라 파미가 등 배우들이 감독으로 전향하는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향이 컸다.
“반대로 살 용기가 있는가?”
1.
복싱은 어렵다. ‘반대로’ 해야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앞(뒤)으로 가려면 뒷(앞)다리를, 왼쪽(오른쪽)으로 가려면 오른(왼)발을 움직여야 한다. 그뿐인가? 펀치를 날리려면 뒤로 빠져야 하고, 맞고 싶지 않다면 상대 쪽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으면 배려하고(살살 때리고), 상대를 존중하면 배려하지 않는다.(죽도록 때린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가 살고(이기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는다(진다). 링 안의 삶은 링 밖의 삶과 반대다.
메기가 복싱을 배운지 1년 반 만에 챔피언의 문턱까지 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메기만큼 ‘반대로’ 사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심지어 서른이 넘어도 복싱을 놓지 않는다. 여자를 키우지 않는다는 트레이너에게 기어이 복싱을 배우려 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묵묵히 연습을 한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매니저를 거부한다. 이처럼 메기는 늘 ‘반대로’ 산다.
메기 덕분에 프랭키 역시 ‘반대로’ 살게 된다. 여자 선수는 키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뒤집었다. 또 타이틀 매치에서 늘 주저하던 안전주의자 프랭키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과감하게 타이틀 매치로 뛰어든다. 세상의 물살을 거슬러 사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었을까? 챔피언을 목전에 둔 메기와 프랭키에게 참혹한 불행이 닥쳐왔다. 시합 중 사고로 메기 전신마비라는 참혹한 장애를 갖게 되었고, 프랭키는 그런 메기를 보며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는 참혹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메기는 변하지 않았다. 전신마비의 후유증으로 다리마저 잘라내었지만 그녀는 살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녀에게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이고, 죽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넓은 세상도 보았기에 후회도 없다고 말한다.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던 그녀는 마지막 남은 친구 아니, ‘아버지’ 프랭키에게 죽음을 부탁한다. 고민 끝에 프랭키는 그녀의 마지막을 부탁을 들어준다.
그녀는 ‘반대로’ 살았다. 그것이 불행이었을까. 아니다. ‘반대로’ 살았기에 삶은 화려하게 꽃피었고, 그 꽃이 떨어지는 모습 역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누구든 끝이 나는 게 삶 아닌가. 그 삶을 메기만큼 살면 꽤 괜찮게 산 것 아닐까. 세상의 물살에 몸을 맡기는 삶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조화造花로 사는 것 아닌가. 향기도 없고, 피지도 지지 않는 꽃. 수명을 다하면 쓰레기 취급받는 꽃. 어떤 삶이 더 행복한 삶이었는지 말할 수 없더라도, 어느 삶이 더 아름다운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반대로’ 하는 삶. 그것은 장엄한 삶이다.
2.
메기의 죽음은 장엄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종의 찜찜함을 느끼게 된다.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서 꼭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것이 정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할 보편적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삶이라는 것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프랭키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한계를 짚어 내야 한다. 프랭키는 ‘보수’적이고, 메기는 ‘진보’적이다. 프랭키는 전통을 지키려(여자는 복싱을 하면 안 돼! 자살은 해서는 안 돼!) 하고, 메기는 전통을 전복하려(여자도 복싱을 할 수 있어! 내 삶은 내가 끝낼 거야!) 하기 때문이다.
프랭키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명예를 지키고 책임을 진다. 프랭키는 왜 끝내 메기의 자살을 도와주었을까? 그가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메기를 가르친 것도 자신이고, 챔피언 매치를 성사시킨 것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프랭키에게 메기는 단순한 제자가 아니다. ‘모쿠슐라(사랑하는 내 혈육)’다. 그는 명예와 책임을 아는 보수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파괴될 것임을 알고도 그녀의 자살시켜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수주의의 한계다. 진정한 보수주의라 하더라도, 아니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보수주의자는 ‘이념·신념·체제의 유지’와 ‘개인의 명예·책임감’에 사이에 갇혀 있다. 그래서 언제나 경직되어 있다. 그러니 프랭키는 ‘그녀의 자살을 도와야 하나? 그러지 말아야 하나?’라는 이분법적 고민에만 머물렀던 것이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프랭키였다면 어쨌을까 고민해본다. 자살시켜달라는 메기에게 죽비를 내려쳤을 테다.
“영웅 놀이 하지 말거라! 몸뚱아리가 없어도 네겐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 삶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살아야 한다. 가능성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나의 죽비에도 불구하고 메기가 죽음을 원한다면 나 역시 그리 해줄 테다. 하지만 프랭키처럼, 자신의 지켜야 할 것들과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 사이의 방황만으로 그리하진 않을 테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죄책감 혹은 책임감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아 있을지 모를 기쁨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챔피언은 메기다. 메기는 마지막 까지 ‘반대로’ 살았고, 프랭키는 끝내는 ‘반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랭키가 죽음을 원하는 메기를 ‘반대로’ 살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보수주의자에게 그것은 허망한 바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