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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2017)

“‘헛된 희망’을 부여잡을 수 있는가?”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 마틴 맥도나

*마틴 맥도나는 영국출신으로 극작가영화 각본가영화감독이다.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쓰리 빌보드》를 통해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헛된 희망’을 부여잡을 수 있는가?”



1.

이 영화는 ‘헛된 희망’으로 시작해 ‘헛된 희망’으로 매듭지어진다. 그 시작과 매듭 사이에서 ‘헛된 희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헛된 희망’의 시작은 인적 드문 길에 설치된 세 개의 광고판이다. 죽어가는 동안 강간을 당한 여자 아이와 그 엄마가 있다. 엄마의 이름은 ‘밀드레드’다. 광고판을 설치한 이가 밀드레드다. 그 광고판은 얼핏 헛되지 않은 희망처럼 보인다. 살인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 경찰들에게 압력을 행사해서 범인을 잡고 싶은 것이니까.


 딸의 죽음에 대해 마지막 도리를 다하고 싶다는 희망. 그렇게 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는 희망.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은 희망이다. 몇 해를 거리에서 싸운 세월호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곧 밀드레드는 희망은 ‘헛된 희망’이었음이 드러난다. 경찰들은 태만하게 수사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윌라비 서장은 밀드레드를 직접 찾아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윌라비 서장은 덧붙인다. “저 췌장암이에요” 밀드레드는 답한다. “알고 있어요.” 


 이 얼마나 헛된 희망인가. 이미 열심히 수사하고 있는 경찰들을 더 압박하기 위해 광고판을 세우는 것, 또 죽어가는 윌라비를 괴롭히는 것. 밀드레드의 희망은 이토록 헛되다. 어쩌면, 그 희망이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밀드레드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차를 빌려 달라’는 딸의 요구를, ‘왜 걸어 다니지 않아?’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바로 그날, 딸아이는 죽어가며 강간을 당했다. “걸어가는 길 가에서 강간당할 거야!” 딸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다.

  

 밀드레드는 알고 있다. 자신이 딸을 죽였다는 걸. 그 가슴 찢어지는 죄책감을 감당할 길이 없다. 밀드레드는 그 아픔을 어떻게든 감당해보려고 헛된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밀드레드의 희망은 가슴 시리도록 헛되다. 그 ‘헛된 희망’은 더 큰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윌라비는 자살을 하고, 그로인해 마을 사람들은 밀드레드에게 등을 돌린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은 증오가 된다. 그렇게 밀드레드의 증오는 더욱 커져 간다. 전 남편이 밀드워드에게 말한다. “그런다고 죽은 딸이 돌아오지 않아” “증오는 결국 더 큰 증오를 낳을 뿐이야”


 세상 사람들의 말처럼, ‘헛된 희망’은 정말 헛된 것일까? 그것은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피해야 할 희망일까? 아니다. 헛된 희망만이 진정한 희망이다. 밀드레드는 샴페인 병을 꽉 쥐고 전 남편을 향한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 병으로 전 남편을 내려쳤을 테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 친구에게 잘해주라’며 샴페인을 건넨다. 그 어떤 헛된 희망도 품지 않았다면, 밀드레드는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그녀는 영원히 증오에 가득 차, 세상을 저주하는 아니 자신을 저주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테다.     


2.

헛되지 않은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유용한 희망은 우리를 더 깊은 절망을 몰아넣을 뿐이다. ‘내가 뭘 해도 죽은 딸이 돌아오지 않으니 이제 내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해!’라는 합리적이고 유용한 희망이 안내하는 곳은 절망의 나락이다. 떨어지는지도 모른 채 떨어지는 절망의 나락. 오직 헛된 희망만이 진정한 희망이다. ‘이걸 한다고 내 삶에 어떤 도움이 될까?’ ‘이걸 하는 게 내 삶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지 않을까?’ 이런 헛된 희망만이 삶을 구원한다. 그때 진정으로 세상과 자신을 긍정하며 그것들과 화해할 수 있다.


 밀드레드의 삶은 그런 ‘헛된 희망’이 어떤 것이지 말해준다. 그녀 헛된 희망으로 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여가고 있다. 그렇게 세상 그리고 자신과 화해나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밝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딸을 죽인 범인이라고 확신했던 이가 범인이 아니었음을 밝혀지며 하나의 헛된 희망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밀드레드는 다시 헛된 희망을 찾는다.           


 딸을 죽이지 않은, 하지만 누군가를 그렇게 죽였을지도 모를 범인을 죽이러 떠난다. 그를 죽이려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가 누군가를 강간하고 죽였다는 듯한 이야기를 술집에서 떠벌렸기 때문이다. 이 또 얼마나 헛된 희망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술집에서 했던 이야기만으로 한 사람을 죽이러가는 일이.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알고 있다. 헛된 희망은 헛되지 않다는 것을. 함께 범인을 죽이러 가는 이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이 삶의 진실을 느끼게 된다.


“괜찮겠어?”
“그 놈 죽이는 거? 사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요?”
“나도 그래. 그건 우리가 가는 길에 결정할 수 있겠지.”


 헛된 희망이 희망인 이유를 알겠다. 의미를 잃은 삶을 계속 걸어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헛된 희망으로 살아가다보면 삶은 조금 더 아름다워진다. 그것이 헛된 희망이 헛되지 않은 이유고, 헛된 희망만이 진정한 희망인 이유다. 그렇게 이 영화는 헛된 희망으로 시작해서 헛된 희망으로 매듭지어진다. 끝이 아닌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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