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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오렌지(1971)

“우리 안의 ‘알렉스’를 어떻게 할 것인가?”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 스탠릭 큐브릭

*스탠릭 큐브릭 : 미국 뉴욕 출신 영화감독. “19세까지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스탠리 큐브릭에게 의사인 아버지는 사진을 권유한다. 사진에 입문해서 두각을 나타내며 17세에 잡지 ‘LOOK’에 수습기자가 된다. 이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1953년 첫장편 ‘공포와 욕망(Fear and Desire) 통해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이후 살인(The killing) 롤리타(Lolita) 등을 제작하면 금기를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인다.      





“우리 안의 ‘알렉스’를 어떻게 할 것인가?”


『시계태엽 오렌지』는 대단히 불편한 영화다. (실제로 개봉 당시 상당한 논란에 휩싸였다.) 그 불편함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잔혹한 폭력(알렉스)에 대한 미화 때문일까? 이는 표면적 이유일 뿐이다. 이 영화가 주는 불쾌함, 불편함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큐브릭은 직접 말한 바 있다. “알렉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단히 분개하면서 불편해합니다.”     


 그렇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알렉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세 단계의 정서적 변화를 거친다. ‘충동’의 알렉스, ‘금기’의 알렉스, ‘욕망’의 알렉스. 처음의 알렉스는 지극히 충동적이다. 절도, 폭행, 강간, 심지어 살인까지. ‘싱잉 인 더 레인’을 부르며 아이처럼 해맑은 모습으로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다 결국 ‘충동의 알렉스’는 감옥에 가게 되고 거기서 새로운 교화(치료!) 프로그램인 ‘루드비코 프로그램’을 받게 된다.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폭력이나 섹스를 떠올리면 고통스러운 신체적 반응(구토, 메스꺼움)을 야기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알렉스는 ‘금기’의 세계로 들어간다. 폭력이나 섹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구역질을 하게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금기의 알렉스’의 탄생이다. 이제 알렉스는 어떠한 폭력이나 섹스와 관련된 범죄를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사회적으로 치료되었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알렉스는 다시 역逆 ‘루드비코 프로그램’을 받게 된다. 그는 다시 폭력이나 섹스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매혹적인 여성과 즐겁게 섹스를 하는 상상하며 알렉스는 말한다. “나는 이제 치료되었어!”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닌가? 충동의 나, 금기의 나, 욕망의 나. 어린 시절 우리는 거칠 것이 없다. 욕구가 들면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자고 싶으면 잤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 역시 ‘금기’라는 ‘루드비코 프로그램’이 가해진다. ‘먹지 마!’ ‘자지 마!’ ‘만지지 마!’ 그 금기는 너무도 강렬하게 우리 내면을 지배하게 된다. 당연하지 않은가. ‘루드비코 프로그램’(금기)은 ‘행동’(범죄)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처벌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단지 욕망할 뿐인 자신을 처벌하는 순종적인 ‘나’가 된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금기가 강해질수록, 욕망을 처벌할수록 우리는 더 큰 욕망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욕망의 나’가 된다. 점잖은 척, 착한 척 하지만 우리는 모두 추악하고 불결한 욕망을 갖고 있다. 누군가를 잔인하게 때리고 싶은, 끌리는 사람과 침대에서 온 몸을 탐닉하는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금기에 지쳐버리면 어느 순간 우리는 ‘나’의 욕망에 토악질을 해대는 것을 넘어, ‘나’의 욕망을 긍정하게 된다. 그렇게 마음껏 욕망하게 된다.


 ‘충동’에서 ‘금기’를 넘어 ‘욕망의 나’까지 오게 되었다면, ‘알렉스’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 치료된 것일까? 아니다. 욕망의 실현 없는 욕망은 더 왜곡되고 더 뒤틀어진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욕망의 알렉스’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자신의 말처럼, 치료되었으니 건강하고 유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글쎄. 장담할 수 없다. 알렉스는 욕망할 뿐 욕망을 섣불리 실현하려 하고 하지 않을 테다. 다시 끔찍한 감옥에는 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욕망의 실현 없이, 욕망만 하는 알렉스는 포르노 중독자가 되거나 '바바리맨에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는 드글거리는 욕망이 있다. 그런 것들을 마음껏 욕망한다. 하지만 그 욕망만 있고 욕망의 실현이 없다면 우리는 더 왜곡되고 뒤틀어진 욕망에 지배될 뿐이다. 그것은 결코 유쾌하거나 건강한 삶이 아니다. 알렉스도 우리도 딜레마에 빠졌다. 충동과 욕망 사이의 딜레마다. 욕망의 실현은 충동이다. 하지만 충동은 폭력 아닌가. 쉽게 말해, 매혹적인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무작정 실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는 폭력이니까.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알렉스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있다. ‘사랑’이다. 그는 ‘충동·금기·욕망’의 세계만을 경험 했을뿐, ‘사랑’의 세계는 경험하지 못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알렉스다.) 바로 이 ‘사랑’으로 ‘충동’과 ‘욕망’ 사이의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다.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자신에게 아무리 불결하고 추악한 욕망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기꺼이 그 욕망의 대상이 되어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이 알렉스가 경험해보지


 알렉스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알렉스와 섹스를 해줄 테다. 그녀에게는 알렉스만 보일 테니까. 그렇게 알렉스는 욕망을 실현을 할 수 있을 테다. 그렇게 알렉스는 사랑에 눈을 뜨게 될 테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기! 이것만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충동과 욕망 사이의 딜레마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욕망의 폭력성에서 기쁨을 느낄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주어진 체제에서 길러졌다. 그런 우리들에게 기쁜 삶으로 가는 여정은 필연적으로 네 가지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충동, 금기, 욕망 그리고 사랑이다. 욕망의 긍정은 중요하다. 욕망을 긍정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폭력이 난무하는 충동에 머물거나 금기에 지배당해 자기혐오에 토악질을 해대느라, 사랑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욕망의 긍정은 끝(치유)이 아니다. 사랑을 위한 시작일 뿐이다. ‘알렉스’는 욕망의 긍정으로 “나는 이제 치유되었다” 말했지만, 우리 안의 ‘알렉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치유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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