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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 라 비스타 (2011)

“우리의 ‘엘 씨엘로’는 어디인가?”

아스타 라 비스타 (Hasta la Vista, 2011), 제프리 엔트호벤

*제프리 엔트호벤(Geoffrey Enthoven) : 벨기에 출신 방송 PD 및 영화감독. 2012년 제25회 유럽영화상 관객선정상*이 영화는 장애인의 권리 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사회운동가 ‘아스타 팔팟’의 실제 사연을 모티브로 했다.     





“우리의 ‘엘 씨엘로’는 어디인가?” 


‘섹스, 그게 뭐라고 그렇게 까지 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필립’, ‘라스’, ‘요제프’는 세상을 홀로 살아가기 어려울 정도의 장애를 가진 친구이다. 그뿐인가? ‘라스’는 시한부판정까지 받지 않았나. 크고 작은 위험을 감수하며, 그들이 가려는 곳은 장애인들 위한 성매매 업소 ‘엘 씨엘로(천국)’다. 죽기 전의 소원이 섹스라니. 섹스를 위해서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여행을 떠나는 세 친구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묻고 싶다. 성적인 욕망은 왜 죽음을 앞둔 이들의 마지막 삶의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이 하찮은 욕망이기 때문인가? 하찮은 욕망은 없다. 어찌 보면, 하찮은 욕망만이 유일한 그래서 진정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하찮지 않은 욕망은 진짜 욕망이 아니다. 필립, 라스 그리고 요제프가 바랐던 것이 정말 섹스뿐이었을까? ‘엘 씨엘로’로 떠나기 위해 부모들을 설득하며 필립은 말한다. “한번만 우리 스스로, 두 발로 서보고 싶어요.”   

   

 그들이 섹스를 욕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혼자 있을 수 없는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섹스는 가장 내밀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그곳은 혼자 가야하는 곳이다. 그들은 스스로 설 수 없기에 섹스로부터 배제당한 셈이다. '엘 씨엘로'를 부모와 함께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세 친구의 섹스에 대한 욕망은, 원초적인 욕망 너머에 있다. 그들의 섹스를 향한 욕망은 스스로 서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다시 묻자. 그들의 섹스에 대한 욕망은 하찮은 욕망인가? 아니다. 진정한 욕망이다.      


 주어진 ‘장애’(한계)를 넘어 존엄을 가진 한 인간으로 당당하게 서려는 욕망보다 더 간절한 욕망이 어디 있을까. 세 친구는 그 간절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엘 씨엘로’를 향해 떠나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주어진 ‘한계’(장애)가 없는 사람은 없다. 외모이든, 성격이든, 가족이든, 가정형편이든,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한계(장애)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 한 인간으로 당당하게 서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있다.


 이것이 세 친구뿐만 아니라, 우리(인간)에게도 섹스라는 원초적인 욕망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스스로 두 발로 서려면 누군가의 도움(애정,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섹스! 그보다 우리가 더 사랑받고 있다는 마음을 느끼게 해줄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이 꼭 섹스가 아니라도 좋다. 욕망의 실현을 향한 도약은 시도해볼만한 일이다. 그 모험을 감행한 이들은 안다. 욕망의 실현에는 세 가지 층위의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욕망실현의 기쁨’, ‘욕망실현 과정의 기쁨’, ‘다시 생성되는 욕망의 기쁨’ 



 먼저, ‘욕망 실현의 기쁨’은 원초적(섹스) 쾌감이다. 그렇다면, ‘욕망실현 과정의 기쁨’은 무엇인가? 필립, 라스, 요제프는 섹스만큼이나 ‘와인’을 좋아한다. 와인 농장에 들러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라. 그들은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며, 와인을 마셔보며 기쁨을 누린다. 이는 섹스하고 싶다는 하찮은(원초적) 욕망을 따르지 않았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기쁨이었을 테다. 그뿐인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모험의 여정 사이에 더 큰 기쁨을 주는 욕망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이것이 ‘다시 생성되는 욕망의 기쁨’이다. 엘 씨엘로에 도착했지만, 요제프는 직업여성들과 섹스를 하지 않는다. 섹스를 하러 가는 여정에 만난 ‘클로드’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직업여성들과 섹스를 하고 싶다는 ‘쾌락’(더 적은 기쁨 주는 욕망)을 쫓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면, 클로드와의 '사랑'(더 큰 기쁨을 주는 욕망)은 결코 생성되지 않았을 테다. 물론 욕망을 실현하려는 모험에 오로지 기쁨만이 있지는 않을 테다. 크고 작은 슬픔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보다 무엇이든 해보는 삶에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엘 씨엘로’는 어디인가? 우리의 ‘하찮은(원초적) 욕망’은 무엇인가? 그곳이 어디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엘 씨엘로’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하찮은 욕망을 긍정하며 실현하려 애를 써야 한다. 욕정뿐인, 낯선 사람과 뜨거운 하룻밤이면 어떤가? 탐욕뿐인, 돈벌이면 어떤가? 야심뿐인, 관종적 행동이면 어떤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욕망이라면, 그 욕망을 따라야 한다.       


 그 하찮은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우리네 삶에 숨겨져 있던 각가지 기쁨들을 발견하게 될 테다. 그뿐인가? 그 정욕뿐인 하룻밤이,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밀도 높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일지 누가 아는가. 그 탐욕뿐인 돈벌이가,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밥벌이가 시작되는 순간일지 누가 아는가. 그 야심뿐인 관종적 행동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자기만족이 시작되는 순간일지 누가 아는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여행을 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엘 씨엘로’를 찾아 떠난 이들은 안다. '엘 씨엘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엘 씨엘로'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아니 '엘 씨엘로'를 찾아가는 떠나는 여행 자체가 이미 '엘 씨엘로'다. 이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우리가 스스로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매순간이 ‘엘 씨엘로(천국)’가 되기 때문이다. ‘엘 씨엘로’에 도착해 ‘엘 씨엘로’로 떠난 ‘라스’는 분명 웃으며 말하고 있을 테다. “아스타 라 비스타! Hasta la Vista!(또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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