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 1974) 라이너 베르너 (마리아) 파스빈더
*라이너 베르너 (마리아) 파스빈더 :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 빔 벤더스와 함께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거장. 나치의 파시즘의 광풍이 독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파시즘은 유효하며, 다시 새로운 파시즘이 도래할 것임을 예견했던 감독. “사랑이란 사회적인 억압을 극복해 내기 위한 최선의, 가장 교활하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파스빈더의 말이다. 이 말처럼, 그는 파시즘을 넘어 설 대안은 ‘사랑’ 밖에 없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양성애자였던 파스빈더는 사랑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온 몸으로 실험했던 감독이다. (마리아 파스빈더는 그가 여성의 역할을 해야 할 때 썼던 이름이다.
우리는 사랑, 할 수 있을까?
1.
“‘알리’와 ‘에미’의 관계는 사랑이었을까?” 이 질문부터 시작하자. 누군가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만남은 그저 지독히 외롭고 상처받은 두 사람의 정서적 결여가 만들어낸 끌림이라도 차갑게 진단할지도 모른다. “모자란 것들 둘이서 지랄하는 것 아니야?” 이 얼마나 강박적인 진단이란 말인가? 이는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0과 1로 구분하려는, 사랑해본 적 없는 이들의 강박적인 진단일 뿐이다. 그런 강박적인 진단은 삶의 진실을 모르는 무지하고 천박한 진단일 뿐이다.
물론, 정서적 결여가 덜한(성숙한) 두 사람의 사랑과 정서적 결여가 더한(미숙한) 두 사람의 사랑의 밀도가 같을 수는 없다. 후자보다 전자의 사랑의 밀도가 더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어느 외국인 노동자와 독일인이기는 하지만 노구를 이끌고 고된 청소 일을 하는 외로운 미망인 사이의 떨림과 설렘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정서적 결여 없음’이 사랑의 전제 조건이라면, 사랑은 저승(이데아)의 세계에만 있을 뿐, 이승(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정서적 결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삶의 진실을 말하자. 우리 안의 크고 작은 ‘정서적 결여’가 바로 사랑의 전제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알리’와 ‘에미’는 함께 춤을 추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존재를 단숨에 알아갔다. 그랬기에 둘이 처음 만났던 그날, 에미는 알리를 집에서 재워주고, 온 몸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의 외로움과 아픔을 통해 ‘너’의 외로움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랬군요. 당신도 나만큼이나 외롭고 아팠었군요.” ‘알리’와 ‘에미’의 떨림과 설렘(사랑)은 서로의 정서적 결여를 통한 공명共鳴!이었다. 모든 사랑은 그런 공명으로부터 시작된다.
2.
그렇게 시작된 둘의 사랑은 순탄치 않다. 에미는 알리와 사랑을 공표하며 결혼한다. 에미의 이웃은 에미를 혐오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험담을 한다. 또 단골 가게의 주인도 알리에게 면박을 주며 물건을 팔지 않는다. 심지어 에미의 자녀는 어머니를 향한 창녀라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에미도 알리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서로가 아니라면, 누가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를 보듬어주며, 떨림과 설렘의 사랑의 감정을 선사할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칼날 같은 타인들의 시선에 온 몸이 베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에미와 알리는 잠시 지쳐버렸다. 그들은 잠시 칼날을 피해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기적이 펼쳐진다. 이웃도, 가게 주인도, 에미의 자녀들도 모두 둘의 사랑을 존중하는 척한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에미는 주변의 거짓된 존중에 안도감을 느끼며 ‘정상적인 독일인’으로 복귀한다. 이때부터 알리는 다시 외로움과 상처 속에 놓이게 된다.
‘정상적인 독일인’이 된 ‘에미’는 예전의 ‘에미’가 아니다. 지인들에게 알리의 근육을 만져보라고 권한다. 쿠스쿠스가 먹고 싶다는 알리에게 ‘독일에서는 쿠스쿠스 같은 것은 안 먹는다.’고 짜증을 낸다. ‘에미’는 아랍인 노예를 부리는 백인 여주인이 되어 버렸다. ‘알리’를 구경거리 취급하는 ‘에미’, 그런 ‘에미’에게 상처받아 외도를 하는 ‘알리’ 이렇게 둘의 사랑은 어긋나버렸다. 둘의 사랑은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사랑은 싸움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한 싸움. 그 싸움 자체가 바로 사랑이다. 그 싸움이 멈출 때 사랑도 멈춘다. 에미와 알리의 사랑은 언제 꽃피었을까? 주변의 편견과 혐오에 맞서 싸울 때다. 그때 힘들었지만, 서로를 사랑했다. 에미와 알리의 사랑은 언제 시들었을까? 싸움이 멈추었을 때다. 에미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 ‘정상적인 독일인’의 자리에 복귀했으니까 말이다. ‘지배자(독일인)-피지배자(외국인 노동자)’의 구도에서, 에미는 알리만을 남겨두고, 지배자의 자리로 옮겨간 것이다. 싸우지 않아도 되기에 편해졌지만 사랑은 끝났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지배할 뿐, 사랑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 영화는 파시즘과 사랑을 정면으로 다룬다. 파시즘이 무엇인가? 인간의 악마성을 날조해 거대하게 증폭하는 일이다. 나치의 파시즘이 정확히 그렇지 않은가. 유대인의 악마성을 날조해 거대하게 증폭했다. 이것이 게르만족이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는 정서적 토대가 되었다. 파스빈더의 힘은, 1974년 이 영화를 선보였다는 데 있다. 이 때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파시즘 적 반유대주의가 어느 정도 해소된 시기였다. 그러니 이제 파시즘이란 것이 낡은, 그래서 이제는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였다.
파스빈더는 파시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직감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아랍인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무슬림 이민자들로 옮겨 갔고 있을 뿐이었다. 파시즘은 끝나지 않았다. ‘나치의 파시즘’이 끝난 자리에 ‘일상의 파시즘’이 들어차고 있다.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분노가 알리를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알리를 사랑했던 ‘에미’마저 그 파시즘적 물결에 휩쓸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일상의 파시즘’은 ‘왕따의 반복 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왕따를 당했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다시 왕따 시킬 이들을 찾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왕따시키는 반복의 논리.
에미는 알리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다. 단, 파시즘적 태도로 무장한 이들과 싸움을 멈추지 않을 때만 그렇다. 이 영화는 ‘에미’가 병원에 누워 있는 ‘알리’를 간호하는 장면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되었다. 차가운 계단에 혼자 걸터앉아 외롭게 빵을 먹고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외국인 노동자 ‘올란다’가 기억나는가? ‘에미’는 그녀 곁에서 함께 있어주는 장면으로 끝나야 했다. 내가 사랑하는 ‘알리’가 바로 ‘올란다’이니까 말이다. ‘알리’를 구하려 ‘올란다’를 외면하는 순간, ‘일상의 파시즘’은 이어진다.
‘일상의 파시즘’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알리’와의 사랑도 없다. ‘올란다’를 버리고 ‘알리’를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알리’는 다시 ‘올란다’일 테니까. 사랑은 싸움이다. 한 사람을 지켜내려는 싸움이고, 그 한 사람을 지켜내려고 파시즘에 맞설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그 싸움을 멈추는 순간, 패거리만 남을 뿐, 사랑은 없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가? 혹여 내가 사랑하는 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일상의 파시즘’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프게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