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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 (万引き家族, 2018)

어느 가족 (万引家族, 2018) 고레다 히로카즈

* 고레다 히로카즈 : 일본영화감독이자 다큐멘터리 연출가. “저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두드러지는 면은 '무엇을 보여 주지 않는가?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는가?'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히로카즈의 말처럼, 그는 분명 우리 곁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이야기되지 않는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죽음과 이혼과 같은 마주하기 불편한 주제를 주로 다루면서도 히로카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의 시간이나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 주고 싶다.” 그는 자신이 끝내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일상의 빛나는 순간’이라고 했다. 『걸어도 걸어도』 『어느 가족』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무도 모른다』 등등. 그가 가족이라는 주제를 주로 다루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는 죽음과 이혼, 폭력처럼 마주하기 불편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바로 그 지점을 정면으로 응시해야지만 비로소 ‘일상의 빛나는 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족이라는 공동체. 공동체라는 가족.


1.

‘쇼타’네는 가족일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가족은커녕 유괴를 일삼는 좀도둑 집단일 테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공동체다. 가장 원초적인 공동체. 한 인간이 태나면서부터 혹은 그전부터 이미 함께 사는 것으로 결정된 공동체.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가족이다. 정확히는 유사가족이고, 가족을 모델링하려는 것이다. 동호회, 종교, 직장, 기타 여러 사적 모임을 생각해보라. 이 다종다양한 공동체들은 모두 가족을 모델삼고 있다. 어느 공동체이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려는 것은 가족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위로와 배려의 따뜻한 연대감을 확장하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공동체 구성원을 극심한 경쟁으로 몰아넣는 대기업조차도 자신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했을까.      


 가족이라는 신화가 있다. ‘가족은 행복의 기원이기에 다른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 신화에 대한 강력한 믿음. 바로 그것이 모든 공동체가 가족을 모델링하려는 이유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가족이라는 신화는 정당한가? 아니다. 가족은 행복보다 불행의 기원인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히로카즈는 이 지점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쇼타’네 구성원들은 왜 모였을까? 막내 ‘유리’가 ‘쇼타’네 구성원이 된 이유가 같을 테다. 저마다의 가족으로부터 상처받고 버려졌기에 ‘쇼타’네 구성원이 된 것이다. ‘오사무’도, ‘노부요’도, ‘아키’관계도, ‘하츠에’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관계 때문에 발생한 상처로 인해 함께 모여 있다.


 가족이라는 신화는 허구다. 있는 그대로의 가족을 보라!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에게 긴 시간 자행했던 크거나 작은, 단순하거나 기묘한 폭력을 생각해보라.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행했던 폭력(“시키는 대로 해” “다 널 위한 거야”). 그 폭력 때문에 생긴 피해의식으로 부모에게 행사했던 폭력(“다 당신들 때문이야.” “내 인생을 책임져”). 그 폭력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거머리가 된 애증의 관계. 이것이 가족의 맨얼굴이다. 가족은 행복의 기원이기보다 불행의 기원에 더 가깝다. 이것이 불편하게 들린다면 이미 가족이라는 신화를 내면화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족이라는 신화는 어떻게 신화가 될 수 있었을까? 박제다. 혈연관계를 바탕에 둔 관계의 박제. 전통적인 가족은 관계의 박제다. 역동적으로 숨을 쉬는 관계를 질식시켜 박제시켜놓는 관계. 이는 인간에게 강력한 매혹이다. 나약한 인간은 언제나 불확실한(버림받을 가능성이 있는) 관계를 견디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버림받지 않아. 가족이 있으니까.” 이것이 가족이라는 신화의 근간이다. 나약한 사람일수록 가족이라는 신화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관계의 박제를 통해 강력한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가족 안에서 서로를 질식케 한다.

 

 전통적인 가족이 질식해갈 때 ‘쇼타’네는 숨 쉬고 있다. 웃으며 함께 밥을 먹고, 애틋하게 서로를 돌봐주고, 함께 여행을 간다. ‘쇼타’네 ‘가족’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쇼타네 ‘가족’ 중 어떤 이도 혈연적 뿌리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리’는 언제든 집에 데려다주면 그만이듯, 다른 이들도 언제든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 관계는 끝이다. 그 불확실하고 모호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주려는 마음이 피어났다. 그 불확실함과 모호함이 좀도둑 집단을 꽃처럼 향기 나는 애틋한 ‘가족’으로 만들었던 셈이다.


2.

가족이 ‘결정된’ 공동체라면, 공동체는 ‘선택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가족은 (결정된) 공동체일 뿐이지만, 공동체는 (선택한) 가족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보다 공동체가 중요하다. 결정된 가족을 넘어선 선택한 가족이라는 공동체. 가족이 좋은 ‘가족’이 되려면 먼저 좋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공동체의 조건은 무엇인가?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견뎌내는 사랑이다. 박제시키지 않은 관계의 불확실함과 모호함 속에서 서로를 애틋하게 사랑해주는 것. 이것이 결정된 공동체와 선택한 공동체를 ‘가족’으로 만들 수 있는 조건이다.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제거하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함과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좋은 공동체의 조건이다. ‘쇼타’네 공동체는 ‘가족’이다. 어느 누구 하나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다. 무엇하나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 없다. 치정관계에 얽힌 살인사건의 공모자인 ‘오사무’와 ‘노부요’ 아닌가? 가족으로부터 상처받고 버림받은 ‘아키’, ‘하츠에’ ‘유리’ 아닌가? 이처럼 저마다의 어둠을 가진 이들은 늘 자신이 버림받을까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불확실과 모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 두려움, 불확실함, 모호함 때문에 서로를 애틋하게 보듬을 수 있다. 불확실하기에, 모호하기에, 버림받을까 두렵기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기만이다. 바로 그 불확실함, 모호함, 두려움 마음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너는 언제든 떠날 수 있어. 우리의 관계도 그렇게 끝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지금 너를 힘껏 사랑할 거야” ‘나’를 떠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 이 사랑은 가진 것이 없는 이(소외된 자)들의 힘이자 가능성이다.

    

 아이를 위한다면 왜 도둑질을 가르쳤냐는 경찰의 다그침에 ‘오사무’는 고개를 떨구며 말한다.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오사무’를 비난한다고 해도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오사무’의 마음을 알고 있다. 언젠가 대안 공동체를 구상하던 지극히 현실적인 이가 경찰처럼 취조하듯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은 왜 사람들에게 철학을 가르칩니까?” 그날 밤, 미처 답하지 못한 말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혼자 중얼거렸다.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어요.” ‘결정된’ 가족 너머 ‘선택한’ 가족을 꾸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철학을 가르치는 일밖에 없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었으니까.


 이 영화의 원 제목은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 Shoplifters)이다. 이는 적절치 않은 제목이다. 그들이 훔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족’이다. 따뜻한 마음과 기쁜 시간을 함께 하는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위로와 배려는 주는 가족. 박제시키지 않은 채로 살아 있는 가족. 영화가 시작할 때는 ‘좀도둑 가족’이지만, 영화 끝날 때 우리는 안다. 이들은 ‘큰 도둑 가족’이라는 것을. 상자를 딛고 올라서야만 밖이 겨우 보이는 높은 난간에서 ‘쇼타’를 애처롭게 기다리는 ‘유리’처럼, 나 역시 ‘쇼타’를 기다리고 있다. 겨우 얼굴 끝만 보이는 난간 위에 ‘유리’를 혼자두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가있는 '쇼타'처럼, 나 역시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나는 ‘어느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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