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아메드(YOUNG AHMED2019)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다르덴 형제 : 벨기에 출신 영화감독이자 영화 제작자. 형(장 피에르 다르덴)은 드라마를 전공했고, 동생(뤽 다르덴)은 철학을 전공했다. 다르덴 형제는 삶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주류(혹은 평균)의 삶이 화장한 얼굴이라면, 소외된 자들의 삶은 맨얼굴이다. 『로제타』 『내일을 위한 시간』 『아들』 등의 작품에서 소외된 자들의 일상을 주제로 다룬다. 다르덴 형제는 바로 이 삶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는 그들이 영화를 다루는 내용(주제)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그렇다. 다르덴이 영화를 다루는 형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핸드핼드’ 촬영 방식과 비전문 배우 캐스팅이다. 다르덴은 ‘핸드헬드’(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하지 않고 손이나 어깨로 들고 촬영하는) 촬영방법을 고수하며, 비전문 배우로 작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다르덴의 영화는 흔한 상업영화처럼 보기 편하지 않다. 화면의 흔들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맨얼굴 아닌가. 우리는 늘 흔들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다르덴은 스크린 위에 진짜 삶을 펼치려 한다. 또한 그들은 영화와 현실을 벽을 허물기 위해 비전문 혹은 무명 배우로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배우가 연기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한 인간이 삶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그렇게 그들은 삶의 맨얼굴을 보여주려 애를 쓴다. 이제는 나이 들어 노인이 되어가는 다르덴 형제는 거장이라 할만하다. 삶의 맨얼굴을 보여주려는 리얼리티의 거장.
“삶은, 사랑 아니면 죽음이다.”
1.
‘아메드’는 왜 살인마저 불사할 광신도가 되었을까? 극단적 무슬림을 전도하는 ‘이맘’ 때문일까? 아니다. 아버지의 부재, 알콜중독 어머니, 유럽사회에서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소외감 때문이다. 그렇다. ‘아메드’는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종교적 신념에 빠진 셈이다. ‘이맘’은 단지 하나의 촉발제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아메드’의 삶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 자체이다. 아메드는 자신과 타인마저 해치는 극단적인 무슬림에 심취해 있다. ‘아메드’는 어떻게 광기어린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 삶을 돌아올 수 있을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자리 잡은 종교적 신념은 집요하다. 아메드는 살인미수를 거쳐 소년원(보호감호) 시설에 들어가서조차 ‘이네스’를 해칠 계획을 멈추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는 이에 대해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 광신도들을 상담한 교육자, 심리학자, 심리분석자를 여럿 만나본 결과, 광신자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심지어 엄마까지도 광신도로 만들며 그 반대의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광기는 인간 내면 깊숙이 파고든다.” 다르덴은 주인공을 ‘소년 아메드’로 한 이유도 그래서다. 아직 변화 가능성이 있는 소년만이 광기어린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메드’에게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루이즈’다. ‘아메드’는 ‘루이즈’에게 마음이 빼앗기고 잠시지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흔들린다. 하지만 이성애적 ‘사랑’만으로 역부족이다. 광기가 되어버린 종교적 신념을 근본적으로 허물기에 이성애적 첫‘사랑’의 힘은 턱없이 부족하다. ‘첫사랑으로 광기에 육박한 종교적 신념이 해체되다!’ 이는 삼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진짜 삶에서는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광기가 되어버린 종교적 신념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아메드’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추락’이다. 사랑마저 집어삼킨 ‘아메드’의 종교적 광기는 질주한다. 쇠꼬챙이를 주워들고 ‘이네스’를 죽이러 간다. 그렇게 건물을 오르던 아메드는 ‘추락’한다. 그 광기어린 ‘쇠꼬챙이’를 놓지 못해서. 아메드는 그 ‘추락’에서 죽음을 보게 된다. ‘아메드’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는 죽음이다. 죽음 앞에 이른 아메드는 “엄마”를 되뇐다. ‘알라’가 아닌 ‘엄마!’ ‘이네스’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꼬챙이는 이내 절박하게 삶을 요청하는 수단이 된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아메드’는 ‘이네스’ 사과한다. “죄송해요.” 그렇게 아메드는 사랑과 죽음을 넘어 겨우겨우 삶의 언저리로 돌아온다.
결국, 사랑 아니면 죽음이다. ‘사랑’(루이즈)에 몸을 던지지 못하면 결국 ‘죽음’(이네스 혹은 아메드)을 맞이할 뿐이다. 하지만 사랑과 죽음은 반대편에 있지 않다. 사랑과 죽음은 언제나 다시 연결된다. 무슬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엄마(백인 여자)를 증오한 ‘아메드’ 아닌가. 하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다시 원초적인 사랑(엄마!)을 찾는다. 사랑을 놓치면 죽음이 찾아오지만, 그 죽음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다시 사랑을 만나게 된다. 진짜 사랑과 진짜 죽음 앞에서 서 본 이들은 이 삶의 진실을 알고 있다.
2.
‘아메드’를 통해 ‘우리’를 본다. 우리 역시 광기어린 신념에 빠져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자본주의라는 광기어린 종교에 빠져 있지 않은가. “돈(알라)만 있으면 돼. 돈(알라)을 위해서 못할 짓은 없어” 그 광기어린 신념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사랑 아니면 죽음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거나 추락해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사랑에 온 몸을 던져 ‘돈, 돈, 돈’ 거리는 허황된 신념에서 벗어나던지, 아니면 돈을 움켜쥐느라 추락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불행이라고 말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돈을 움켜쥐느라 맞이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다시 사랑을 만나게 된다. 죽음의 문턱에 서본 이들은 안다. 돈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서글프게도, 비로소 그때 ‘돈’의 유일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메드’가 ‘이네스’를 죽이려던 광기어린 ‘쇠꼬챙이’로 삶을 요청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광기어린 돈이라는 꼬챙이로 삶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 손에 남겨진 유일한 것이니까
“네게 돈을 줄 테니 병간호를 자주 와다오” “유산을 받고 싶거든 자주 찾아오너라.” “네가 필요한 걸 사줄 테니 내 곁에 있어줘.” “좋은 차를 타고 있는 나를 사랑해줘.” 죽음 앞에서 꼬챙이로 도움을 요청하는 ‘아메드’, (물리적 혹은 정서적) 죽음을 앞두고 돈으로 사랑하는 요청하는 '우리'. ‘아메드’와 ‘우리’는 지독히도 닮아 있지 않은가.
아메드를 통해 ‘나’를 본다. 나 역시 철학이라는 신념에 광기가 서려 있지 않은지 되돌아본다. 철학 역시 신념이다. 모든 신념은 믿음이기에 광기가 서릴 수 있다. 철학도 예외일 수 없다. 고백하자. 나는 ‘아메드’였다. 사람으로 철학을 보려 하지 않고, 철학으로 사람을 보려 했던 시간이 있었다. 서슬 퍼런 날이 서 있던 시간들이었다. 나의 철학으로 삶을 살아내지 않는, 살아내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얼마나 날선 증오의 시선으로 보내던가. “철학적이지 못한 배교자 새끼들!”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았다.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지금 나의 철학은 광기어린 신념을 넘어 사람을 사랑하는 신념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이제 안다. 한 사람을 보지 못하면 철학(신념)도 보지 못한다는 걸. 철학(신념)으로 한 사람을 예단하려 하지도 않고, 철학(신념)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한 사람으로 철학(신념)을 본다.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나면 나의 철학은 물결치듯 변한다. 철학보다 중요한 건 사람이니까. 그것이 이제 나의 ‘철학’이다. 광기어린 독선과 독단의 철학을 지나 한 사람을 보는 철학의 초입에 들어서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사랑 덕분이다. 철학 하며 지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아찔할 때가 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을 걷는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니 나는 운이 좋았다. 내 곁에 너무 늦지 않게 나타나 준 ‘루이즈’들 덕분에 추락을 면했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사랑’을 만났다. 나의 독선과 독단을 따뜻한 시선으로 안아주려 했던 ‘루이즈’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추락했을 테다. 내 인생이 삼류 소설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메드’는 사랑을 놓쳐 추락(죽음)했지만, 나는 사랑을 잡아 추락(죽음)을 면했으니 말이다. 소중한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삶은 사랑 아니면 죽음이다. 죽음이 오기 전에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