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매 (2020) 이승원
*이승원 : 한국 연극 연출자 및 영화감독. 이승원은 가족, 폭력, 고통, 상처라는 주제로 영화를 끌고 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는 폭력, 그 폭력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그 고통으로 인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있다. 이승원은 이를 통해 인간이라는 어떤 존재이며, 그런 인간들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는 또 무엇인지를 묻는다. 『소통과 거짓말』 『해피뻐스데이』 전작들에서 볼 수 있듯, 그는 평균 훨씬 (누군가에는 조금) 이상의 폭력과 고통, 상처를 다룬다. 이승원 감독의 작품들은 우리의 윤리성(네가 생각하는 윤리성이 뭐야?) 혹은 보편성(네가 생각하는 정상적이란 것은 편견 아니야?)을 시험하는 듯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감독이 만들어내는 불편하고 불쾌한 지점을 정면으로 응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그런 인간들이 서로 뒤엉키며 만들어내는 삶이란 것은 또 무엇인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이고, 그 삶 너머는 고통의 몸부림으로만 갈 수 있다.”
1.
첫째 ‘희숙’, 둘째 ‘미연’, 셋째 ‘미옥’, 막내 ‘진섭’의 삶은 저마다 각자 엉망이다. ‘희숙’은 보는 것만으로 암에 걸릴 것 같은 딸과 빚쟁이에 쫒기는 남편 사이에서 한 마디 불만과 불평이 없다. 그렇게 타인의 감정 배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희생하며 산다. ‘희숙’이 진짜 암에 걸린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미연’은 평균적인 혹은 그 이상의 행복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 일뿐이다. 강박적인 종교관, 남편의 외도로 인해 ‘미연’과 그녀 가족의 삶은 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다.
‘미옥’은 제멋대로 살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했고, 아마도 그 일을 돈 걱정 없이 이어나가고 싶어서 애 딸린 이혼한 남편과 결혼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미옥’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각본을 쓰는 일도 엉망이고, 집 안 일도 어머니 역할도 엉망이다. 막내 ‘진섭’은 최악이다.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제대로 된 사회생활조차 하지 못하는 진섭의 삶은 이미 엉망이다.
누가 가족을 행복의 공동체라고 말하는가? 네 남매의 가족 중 어느 가족하나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족이 없다. 이 네 남매의 가족은 왜 불행해졌을까? 가족 때문이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이 네 남매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가족.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상처가 있다. 이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고통과 상처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그 씨앗은 다시 자라 불행이 된다. 어쩌면 가족은 저주 받은 공동체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불행을 대물림하는 저주 받은 공동체. 우리는 이 저주를 풀어낼 수 있을까?
두 가지 가족이 있다. ‘고상한 폭력’의 가족과 ‘원색적 폭력’의 가족. 네 남매의 가족은 ‘원색적 폭력’의 가족이다. 언어적,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는 가족이다. 하지만 ‘미연’네 가족은 ‘고상한 폭력’의 가족이다.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때리는 폭력은 결코 없다. 하지만 이 가족은 고상한 언어와 몸짓으로 폭력을 자행한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엄마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고상한 폭력’은 웃는 얼굴로 서서히 목을 조르는 폭력이다.
이 두 가족은 모두 저주받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또 저마다의 불행을 대물림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 중 어느 가족이 저주의 사슬을 끊고 행복한 가족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클까? ‘고상한 폭력’의 가족일까? 직접적인 폭력이 없었으니 더 쉽게 고통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는 삶의 진실을 한 참이나 모르는 생각일 뿐이다. ‘원색적인 폭력’의 가족이 차라리 낫다. 왜 그런가? 고통의 치유는 고통의 몸부림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몸부림이 없다면, 고통은 영혼을 썩게 하는 고름이 된다. ‘고상한 폭력’은 몸부림조차 칠 수 없다. 그것은 서서히 목을 조르는 폭력인 까닭에 몸부림을 칠 새도 없이 질식하게 된다.
네 남매는 저주의 사실을 끊어가고 있다. 조금씩 밝은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진섭’이 아버지에게 오줌을 갈겼기 때문이다. “씨발놈아 니 때문에 다 망했다고!” 악다구니 외쳤기 때문이다. ‘미옥’이 발악을 했기 때문이다. “아, 씨발. 지랄도 가지가지 하네, 진짜.” ‘미연’이 한 맺힌 절규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과하세요, 목사님한테 말고 우리한테 사과하세요.” “아버지만 빼고 우리 가족 모두 죽어 있게 해주세요. 아버지만 빼고 우리 가족 모두 천국가게 해주세요라고 매일 기도했어요.” 희숙이 잡채를 입에 쑤셔 넣으며 몸부림을 쳤기 때문이다. “이거 50만원 주고 했는데, 이러지 말자, 좀.”
2.
가족만이 고통인가? 아니다. 삶 자체가 고통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불행의 씨앗에서 태어난 이들의 삶이 고통인 것은 당연하다. 그 고통 너머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고통의 몸부림으로만 가능하다. 폭력으로 인해 고통 받은 이들이 다음 삶을 열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고통 받은 몸으로 절규할 것! 그 고통의 절규가 없다면 고통스러운 지금의 삶을 지나갈 수 없다. 나는 이 삶의 진실을 진짜로 알고 있다.
내 삶은 고통이었다. “야이, 씨발년아!” “와 이 씨발놈아!” “니 내 돈 못 벌어 온다고 지금 이 지랄병이가?” “돈이 없는데 애새끼는 어떻게 키울끼고 이 씨발놈아!” 아직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웠던 소리가 귀가에 들린다. “야이 씨발놈아, 니는 딱 너거 아부지다.” 방에 가둬놓고 때리며 저주를 퍼붓던 어머니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네 자매만큼 아니었지만, 나 역시 폭력과 욕설 속에서 자랐다. 내 속의 분노와 증오, 폭력은 그렇게 심어졌다. 그렇게 나는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나는 ‘원색적인 폭력’이 난무했던 가족의 기억을 긍정하고 있다. 그것이 내 삶의 일부임을, 내 몸의 일부임을 긍정하고 있다. 부모의 서러웠던 삶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보다 더 다행인 것은 내 나름으로 불행의 대물림을 끊었다는 사실이다. 좋은 아빠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게 더 적게 상처주려고 늘 노심초사하는 아빠 정도는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고통 앞에서 늘 온 몸으로 절규했기 때문이다. “왜 나한테 지랄인데” 어머니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방안에서 책들을 집어 던졌고, 길거리에서 물건을 부셨고, 학교에서 이유 없이 싸움질을 하고 다녔다. 더 나이가 들어서는 “왜 날 그렇게 때렸어요?”고 따져 묻기도 했다. 그것은 모두 고통의 몸부림이었다. 미친 듯이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썼던 것도 모두 고통의 몸부림이었음을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네 남매가 저마다 고통의 몸부림을 쳤을 때. 아버지는 조용히 유리벽에 머리를 박았다. 피가 흥건히 날 때까지. 지난 온 삶이 후회되어서였을까? 아이들에게 미안해서였을까? 사과를 대신하는 몸짓이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 고통의 몸부림이 없다면 아버지는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누구나 고통 속에 산다. 하지만 아무나 그 고통을 지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몸부림은 아무나 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 받지 않았으면서 고통스럽다고 착각하는 것만큼, 고통 받았으면서 고통스럽지 않다고 착각하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다.
이승원 감독은 왜 그리 과격하고 원색적인 방식으로 고통의 몸부림을 표현했을까? 그것은 우리가 윤리성(그건 너무 쓰레기 같은 짓 아니야?)과 보편성(그건 너무 비정상 아니야?)이라는 사슬에 온 몸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윤리성’과 ‘보편성’이라는 사슬은 고통의 몸부림마저 틀어막는다. 고통 너머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고통의 몸부림. 그렇다. 고통의 몸부림은 때로 비윤리적이고 비정상적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수 있다.
그것이 두려워 윤리적으로, 정상적으로 살고 싶은가? 살아보라. 지독한 고통 속에 있으면서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보라. 고통의 절규를, 고통의 몸부림을 외면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확인하게 될 테니까. 삶 어느 곳에서 받은 폭력으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 고통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절규하고 몸부림쳐야 한다. 그렇게 고통뿐인 삶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밖엔 없다. 우리의 ‘고통’은 무엇인가? 우리의 ‘고통의 몸부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