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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오브 마인(Land of Mine, 2015)

랜드 오브 마인(Land of Mine, 2015) 마틴 잔드블리엣

*마틴 잔드블리엣 : 덴마크 출신 영화감독 및 각본가. 덴마크가 독일 소년병을 이용해 지뢰를 제거했던 일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덴마크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마틴 잔드블리엣 감독은 묻혀 있던 이 불편한 역사적 진실을 꺼낸다. “나는 우리(덴마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중략) 폭력적이고 잔혹한 정권의 일부였을지라도 그들(독일군) 또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감독의 말처럼,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전쟁이라는 참혹한 폭력 소용돌이 속에서는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영화는 참혹한 지뢰 폭발장면을 담으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여름 해변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터지는 지뢰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배경을 담고 싶었습니다. 여름, 모래, 언덕, 따스한 날씨, 바다와 같은 것들이 한때는 아름다운 삶이었음을, 삶이란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임을 끊임없이 되새겨주고 싶었습니다.”     



“피해자인가?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라. 그럴 수 없다면 싸워라!”


1.

“지금 우리가 잘못했다는 거야?” 이 영화를 본 덴마크인(혹은 유대인)들은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덴마크인 ‘칼 상사’는 온몸에 증오가 서려 있다. 그 증오는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참혹하게 짓밟았던 나치(독일)군을 향해 있다. ‘칼 상사’는 패잔병인 나치군이 덴마크 국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이는 덴마크인의 증오의 크기와 깊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증오를 가진 이들에게 이 영화는 불편하고 불쾌할 수밖에 없다.      


 악랄한 가해자였던 나치군은 힘없는 소년들이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였던 덴마크인은 소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랄한 군인이다. 지뢰가 터지는 그 아름다운 죽음의 해변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뒤바뀌어 있다. 이것이 어찌 불편하고 불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작 피해를 당했던 것은 우리(덴마크인)들인 왜 나치군을 불쌍한 피해자로 그리고, 우리들을 사악한 가해자로 그리는 것인가? 나치군이 설치한 지뢰를 나치군에게 제거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불편한 삶의 진실이 있다.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하다. 선하지 않은 피해자를 손쉽게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최소한의 인권마저 유린당하는 폭력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그런 폭력은 비인간성을 증폭하고 확대재생산한다. 그때 인간은 ‘악’만 남아 ‘악’해질 수밖에 없다. ‘악’만 남아 ‘악’해진 마음, 그것이 바로 광기다. ‘악’만 남아 ‘악’해진 피해자들의 광기 서린 눈빛을 본 적이 있는가? 전쟁은 이런 광기 서린 눈빛이 일상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귀 막고 있어.” 풍선하나 터지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덴마크인 ‘대위’의 표정을 보라. 지뢰를 제거하지 못하는, 어쩌면 곧 죽게 될 소년병을 두고 나오는 ‘인간’의 표정이라 할 수 있을까. “내 말 안 들려? 작업해, 당장!” 미친 사람처럼 소리는 지르는 '칼 상사'의 증오에 찬 표정을 보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소년을 지뢰밭으로 내모는 이를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권총으로 머리를 겨누고 놀이를 하듯 소년병들 입에 오줌을 싸대는 군인들을 보라.  “어쨌든 독일인들 골탕 먹었잖아요.” 소년병들이 먹을 것이 없어 쥐똥을 먹고 토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미소 짓는 덴마크 여인의 표정을 보라. 

     

 이들은 분명 비인간적인 광기 속에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독일군들에게 가족과 친구의 사지가 찢기고, 아내와 연인이 강간을 당한 이들의 광기에 누가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덴마크인들의 광기를 손쉽게 비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덴마크인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덴마크인들의 광기를 무작정 용인하기도 어렵다. 비인간적인 광기는 또 다시 폭력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대체 상처 입은 피해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2. 

전쟁은 끝났지만 피해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누가 뭐래도 유대인들이다. 유대인에게 가해졌던 나치군의 만행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로서의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시오니즘Zionism’이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시오니즘이 무엇인가? (‘시온Zion’은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고어다.) 이는 유대인들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다시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이다.      

 지금의 시오니즘은 나치의 그것과 닮아 있다. 유대인들은 2000년 전에 떠나온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땅)에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2000년 가까기 살아온 아랍계 사람(팔레스타인인)들을 그 땅에서 제거하고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로 무수히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전쟁과 테러, 그리고 암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을 어느 지역(가자 지구)에 몰아넣고 학살이라 불러 좋을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가자 지구’를 보며 거대한 ‘아우슈비츠’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 걸까?       


 일부 유대인들(시오니스트)은 '피해자'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가해자가 되었을까? 바로 자신이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해는 자신이 엄청난 피해자이니, 자신이 행하는 어떤 폭력도 괜찮다는 무의식적 정당화의 결과 아닌가. 이는 피해자의 선민의식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의 선민의식은 위험하다. 피해자를 너무 쉽게 가해자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곁에는 이런 피해자의 선민의식이 없는가? 단언할 수 없다. 피해자가 있는 곳엔 언제나 피해자의 선민의식이 들어설 가능성이 있으니까.     


3.

우리 시대에는 우리 시대의 피해자가 있다. 자본의 피해자, 성역할의 피해자가 대표적이다.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인격적 모멸을 당해야 했던 이들이 있다. 이들은 명백한 피해자다. 자본의 피해자. 이들은 선하지 않다. 자신보다 돈이 많은 이들을 근거 없이 비난하거나 폄하하곤 한다. 또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을 당연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손쉽게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성역할의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단지 여성(혹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크고 작은 불이익을 받아야만 했던 이들이다. 이들 역시 명백한 피해자다. 성역할의 피해자. 이들 역시 선하지 않다. 단지 남성(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대를 적대시한다. 또 그런 적대감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폭력에 대해 당연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손쉽게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 역시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사랑하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다. 피해자는 사랑하거나 싸워야 한다.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그 두 가지 길이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칼 상사’는 ‘사랑’으로 치유되고 있다. ‘사랑’은 무엇인가? 이념, 종교, 자본을 넘어 한 사람을 보는 일이다. ‘칼 상사’는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나치군 너머의 한 사람을 보았다. 그렇게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이 피해자가 자신의 삶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일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가 깊을수록 증오도 깊다.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깊은 증오에 차 있기 때문에 사랑이 들어 올 틈이 없다.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더 보편적인 피해자의 마음 상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는 싸워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 응어리진 증오가 충분히 해소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이는 광기어린 폭력을 자행하는 ‘대위’나 시오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아니다. 피해자의 싸움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피해자의 상처는 가해자가 되는 것으로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내는 일일 뿐이다.


 피해자의 싸움은 진짜 가해자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위’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나치군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시오니스트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팔레스타인인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전쟁 그 자체’(국가주의)와 싸워야 한다. 그것들이 진정한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의 피해자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돈 많은 이들과 싸우거나 돈을 더 벌려고 싸워야 하는가? 아니다. ‘자본 그 자체’(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 성역할의 피해자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남자 혹은 여자와 싸워야 하는가? 아니다. ‘성역할 그 자체’와 싸워야 한다. 그것들이 진정한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거나 싸우면 알게 된다. 사랑하면 싸우게 되고, 싸우면 사랑하게 된다는 걸. ‘칼 상사’는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어서 아이들을 아이들의 고향인 독일로 보내준다. 이는 전쟁 그 자체 혹은 국가주의와의 싸움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칼 상사'처럼 사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싸웠다. 내 방식으로, 내 나름으로 자본주의와 싸워왔다. 한 사람을 볼 수 없어서. 사랑할 수 없어서. 


 그 날서 있었던 싸움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지난한 싸움 중에 나처럼 상처받은 한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의 싸움은 피해자의 이름으로 가해자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나는 조금씩 치유되었으니까. 피해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라. 그럴 수 없다면, 싸워라. 다만 진짜 가해자와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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