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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1995)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오시이 마모루

*오시이 마모루 : 일본의 소설가 및 애니메이션 감독. 『공각기동대』, 『인랑』, 『이노센스』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은 대부분 사회비판적인 시각으로 인간의 자아 혹은 정체성을 주제로 다룬다. 이는 오시이 마모루가 과거 열정적인 학생운동을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오시이 마모루는 할리우드가 SF 영화를 다루는 방식과 태도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지는 로봇은 대부분 인간과 대립하거나 인간을 동경하는 존재로 표현된다. 즉 인간은 당연히 스스로 만든 로봇보다 우월하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는 그런 것에 불신과 이의를 품고 있다. 과연 인간이 정말 그렇게 훌륭하고 모든 것보다 우월한 존재일까?” 체제에 저항했던 이들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한계와 부조리로 점철되어 있는 체제를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1995년 작인 『공각기동대』는 지금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심지어 예언서적인 성격마저 갖고 있다.) 이는 오시이 마모루의 철학적 태도 때문일 테다. 오시이 마모루는 흔한 애니메이션 감독이 아니다. 자신의 철학(세계관)을 철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애니메이션 감독 중 한 명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


1. 

“인간은 무엇인가?” 『공각기동대』가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다. 흔히, 인간을 ‘정신’과 ‘신체’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인간적인 정신과 인간적인 신체가 결합된 존재를 ‘인간’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쿠사나기’는 인간인가? ‘쿠사나기’는 인간의 정신(뇌)을 가졌지만 신체는 기계다. 인간을 인간적인 정신과 신체의 결합으로 정의한다면, ‘쿠사나기’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쿠사나기’를 ‘인간’적인 존재로 느낀다. 왜 그런가? ‘쿠사나기’의 ‘정신’ 때문이다. 팔을 잃어 의수를 사용하는 이를 보며 인간이 아니라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 ‘쿠사나기’는 조금 더 많은 신체를 잃었을 뿐이다. 그만큼이나 인간의 ‘정신’은 인간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을 ‘인간적인 정신’으로 규정하려 할 때 기묘한 질문이 따라온다.            


 ‘인형사는 인간인가?’ ‘인형사’의 정체는 ‘프로젝트 2501’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방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자의식을 갖게 된다. ‘인형사’는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자의식을 갖게 된 AI’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는 ‘AI’라는 단어가 없었다.) 이 AI는 기계의 신체로 들어가 몸을 얻는다. ‘인형사’는 인간일까? 우리는 ‘인형사’를 인간이라고 느끼기 어렵다. 왜 그럴까?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신체’가 없기 때문일까? 그런 것도 같다. 인형사의 정신은 ‘AI’이고, 신체는 ‘기계’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형사’는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는 아찔한 경계에 서 있다.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정신이냐? AI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묻게 된다. ‘인간의 정신’과 ‘자의식을 갖게 된 AI’는 무엇이 다른가?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뇌(인간의 정신)가 일종의 전기장치이듯, CPU(AI)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그뿐인가? ‘인간의 정신’은 어떤 존재가 방대한 자연에서 표류하는 과정 중에 탄생한 진화의 결과 아닌가? 이것이 방대한 네트워크에서 표류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탄생하게 된 자의식을 가진 AI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신체를 얻은 ‘인형사’는 자신을 생명적 존재로 주장하며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는 장면을 보라. 시키는(명령) 대로 기계처럼 살아가는 인간들보다 훨씬 인간적이지 않은가.     


 오시이 마모루는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신체를 갖게 된 인형사와 전투를 벌이는 곳은 박물관이다. 박물관 벽면에 생명 계통도가 그려져 있다. 총탄은 계통수 아래로부터 시작되어 위쪽(인간)으로 향해 쏟아진다.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진화의 정점으로 하는 생명 계통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급진적 표현이다. 놀랍지 않은가? 26년 전 작품이 지금 우리 시대의 고민보다 앞서 있다. 알파고(AI)가 이세돌을 압도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우리는 현실의 ‘인형사’(자의식을 가진 AI)를 목전 둔 세대일지도 모른다. 그 시대가 열린다면, 아니 그 시대가 열리기 전에 지금까지 정의된 ‘인간다움’은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2.

“나는 무엇인가?” ‘나’는 ‘기억’으로 정의된다. ‘나’라는 자의식은 ‘나’의 기억에 다름 아니다. 영화 초반에 불행한 청소부를 떠올려보자. 아내와 딸에 관한 기억은 모두 가짜다. 인형사가 청소부의 머리를 ‘해킹!’해서 거짓 기억을 심은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청소부는 주입된 기억을 제거해달라고 울부짖는다. 우리는 그 울부짖음은 이해할 수 있다. 일부(가족‧재산‧몸…)가 아니라 전부(‘나=기억’)를 잃어버린 자가 어찌 울부짖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쿠사나기’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2017년, 루퍼스 샌더스 감독이 리메이크한 『공각기동대』에는 ‘쿠사나기’의 과거 이야기가 나온다. 1995년의 ‘쿠사나기’처럼, 2017년의 ‘쿠사나기’도 늘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쿠사나기 한 때 대학생이었지만, 납치되어 어느 회사의 생체 실험 대상이 된다. 그 회사는 뇌만 남은 그녀의 기억마저 제거한다. 그녀는 기억이 없기 때문에 ‘나’에 대해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주변 상황을 보고 ‘나’다운 게 있다고 판단할 뿐. 만약 전뇌電腦가 고스트를 만들고 거기에 혼을 넣는 거라면, 무슨 근거로 자신을 믿지?” 그녀 역시 ‘나’를 규정하지 못해 청소부처럼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이 제거된 뇌는 전뇌電腦(일종의 CPU)와 무엇이 다를까? ‘기억이 제거된 뇌(쿠사나기)’와 ‘자의식을 가진 전뇌’(인형사)는 무엇이 다를까? 그들이 어떻게 정체성을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은 분명 ‘나’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진화의 계통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지 모르는 시대에 이는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해킹’당해 불쌍한 청소부처럼 거짓 기억에 사로 잡혀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런 SF적인 상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불쌍한 청소부인지 모른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을 편집한 해석’에 가깝다. 그래서 기억은 일종의 환상이다. 사실 행복했지만 불행을 편집한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 사실은 불행했지만 행복을 편집한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 이들은 불쌍한 청소부와 정말 다른 걸까? 이들 역시 환상 속에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도 언젠가는 절규하게 된다. 편집된 해석으로서의 기억은 거짓(환상)이고, 이는 거짓된 ‘나’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거짓된 ‘나’로 살아가는 이들은 언젠가는 절규하게 된다. 나는 ‘기억’이 아니다. ‘나’를 기억으로 정의할 때 우리는 퇴행적인 삶과 혼란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억’은 언제나 과거이고 그것은 환상이니까.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2017년의 ‘쿠사나기’는 잃어버렸던 기억을 찾는다, 따뜻한 엄마에 대한 기억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던 행복한 대학생이었던 기억도 모두 찾는다. 하지만 그는 과거(기억)로 돌아가지 않는다. 공안 9과의 암살요원으로서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는 듯 당당하게 말한다. “기억이 우리를 정의한다고 믿기에 우리는 기억에 집착하지. 하지만 기억은 우리를 정의하지 않아. 우리를 정의하는 건, 언제나 실천이야.”      


3.

나는 ‘실천’이다. 내가 살아가는 ‘실천’이 바로 ‘나’이다. 그 ‘실천’은 무엇일까? 바로 마주침이다. 이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대상들과의 마주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적인 마주침을 의미한다. ‘쿠사나기’는 누구인가? 과거(엄마‧대학생의 기억)와 현재(사이보그‧암살요원)의 마주침, 기계(몸)와 인간(뇌)의 마주침, 사이보그(바트)의 마주침, 네트워크(데이터)와 마주침, AI(인형사)와 마주침. 그리고 그 모든 마주침들(과거‧현재‧기계‧뇌‧사이보그‧네트워크‧AI…)을 하나의 항으로 연결한 연접적인 마주침. 이 모든 마주침을 긍정하는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주름multiplicity’(nⁿ)이 바로 ‘쿠사나기’다.


 ‘나는 누구인가?’ 낡은 질문이다. 이는 고전적인 진화 계통수에 갇힌 질문이다. 어느 개인과의 마주침은 진정한 실천일 수 없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이어서 생성의 폭이 좁은 실천일 수밖에 없다. ‘나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 총알 박힌 진화의 계통수 너머의 질문이다. 진정한 ‘실천’은 인칭적인 실천이 아니다. 그런 인칭적인 마주침으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밖에 할 수 없다. 이런 질문으로 ‘나’를 알 수 없다. ‘나’는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는 우주적인 마주침을 긍정하는 실천으로 규정된다. 비인간적인 대상들(동물‧식물‧음악‧파도‧햇살‧기계‧데이터‧네트워크…)과 마주침, 시간(과거‧현재‧미래)이라는 벡터 사이의 마주침, 어떤 구조 자체(자본주의‧‧국가주의‧인문주의‧생태주의…)와의 마주침. 이런 우주적인 마주침을 긍정하려는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주름multiplicity, 그것이 바로 ‘나(nⁿ)’이다. “이제 어디로 갈까. 네트워크는 방대하거든” ‘인형사’와 마주침(일종의 결혼)으로 생성된 새로운 ‘쿠사나기’는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진정한 ‘나(nⁿ)’는 방대한 연결(네트워크)의 마주침 그 자체이기에, 우리 역시 어디로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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