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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خانه دوست کجاست) 1987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이란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사진작가, 시인. “좋은 영화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나쁜 영화는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키아로스타미의 말이다. 이 말처럼,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적 사건보다 스크린 뒤에 가려진 현실에 주목한다. 스크린 위에 펼쳐진 화려한 허구는 쾌락을 준다. 그 쾌락은 어디서 오는가? 믿을 수 없음에서 온다. 키아로스타미에게 이런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다. 쾌락이 있을지언정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있을 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포탄이 터지는 적진으로 홀로 뛰어드는 ‘라이언 일병’이 아니어도, 목숨이 걸린 아슬아슬한 상황을 넘나드는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아니어도,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려는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아마드’는 ‘라이언 일병’도, ‘스파이 제임스본드’도 아니다. 언젠가 우리였던, 언젠가 우리가 만났던, 그 아이다. 그 아이의 좌충우돌 작은 모험을 통해 우리는 권력, 체계, 이데올로기를 단박에 뛰어 넘어 한 사람에게로 가는 법을 깨닫게 된다. 믿을 수 있는 작은 이야기로, 믿을 수 없는 큰 이야기를 뛰어넘는 키아로스타미는 아름답지 않은가? 그는 ‘코케(이란 북부) 3부작’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 그리고 『클로즈업』 『체리 향기』 『사랑을 카피하다』 통해, 이란뿐만 아니라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이 같은 어른’이 되지 말라. ‘어른 같은 아이’가 되어라. 
그래야 ‘친구’를 찾아 떠날 수 있다.”     


1. 

‘어른’들이 싫었다. 토요일 오후, 친구 둘과 학교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각자 버너, 라면, 코펠을 챙겼다. 해가 졌고, 우리는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버너에 불을 붙였다. 그때, 당직을 서던 선생이 교실 한켠에서 복작거리고 있던 우리를 발견했다. 다음 날, 난리가 났다. 우리는 졸지에 학교 방화 미수범이 되어 있었다. 각자 부모는 학교로 소환되었고, 부모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했다. 방화 미수사건은 부모들이 촌지를 주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 되었다. 돌아보면, 아이들의 귀여운 소동으로, 당직실에서 선생이 라면을 끓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어도 좋을 일이었다. 방화 미수범으로 몰린 것보다 더 억울했던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는 단지 학교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어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부모도, 선생도 어른들은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마드’의 마음을 안다. ‘네마자드’는 한 번만 더 공책에 숙제를 하지 않으면 정말 퇴학을 당할지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 공책을 실수로 가져와 버린 것 아닌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마드’의 속 타는 마음을 어른들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엄마는 연신 ‘숙제해라. 동생을 돌보라’는 짜증나는 말투로 이것저것 명령할 뿐이다. 그뿐인가? 문을 만드는 노인을 제외하면, ‘네마자드’의 집을 찾아 ‘포시테’로 가는 도중에도 ‘이마드’의 말에 귀 기울려주는 어른은 없다. 다들 귀찮다는 듯이 짜증을 내거나, 아니면 자기 할 말한 하고 ‘이마드’의 말에는 들은 체도 않는다.     

 

 ‘나’와 ‘이마드’가 겹쳤을 때, 내 삶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싸워왔다. 왜 그랬던 걸까? 권위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아니다. 그것은 내 싸움의 다양한 양태일 뿐이다. 나의 싸움은, 근본적으로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다. 나는 그토록 싫어했던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지금껏 싸워왔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코케에도, 포시테에도, 마산에도 나쁜 ‘어른’은 없다는 걸. 그들이 나빠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란처럼, 1980년대의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먹고 살기 힘든 시기였다. 그 시대의 어른들에게 아이의 간절한 바람, 다급한 요청은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일 뿐이다. 먹고 사는 데 도움 되지 않는 이야기는 모두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일 뿐이다.      


 나쁜 ‘어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의 싸움은 진짜로 시작되었다. 내가 바로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척박한 삶 한가운데 던져진 어른. 제기랄. 어른을 싫어했던 죄로,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먹고 살기 위해 돈 안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가볍게 무시하는 편한 어른이 될 것이냐? 그 척박한 삶의 한 가운데서도 아이의 이야기를 온 마음으로 들어주는 고된 어른이 될 것이냐?      


 나쁜 어른은 없지만, 미성숙한 어른은 넘쳐난다. 짜증에 차있던 ‘이마드’의 엄마도, 터무니없는 폭력을 너무도 쉽게 교육으로 정당화하는 ‘이마드’의 할아버지도, 아이의 마음보다 원칙을 중시하는 ‘이마드’의 선생도, 촌지를 받아 챙겼던 마산의 그 선생들도 모두 나쁜 어른이 아니다. 그저 먹고 사는 것이 두려워 주춤거리는 ‘아이 같은 어른’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른 같은 아이’는 누구인가?      


 ‘이마드’다.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공책을 전해주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한달음에 달려가는 ‘이마드’ 그가 바로 ‘어른 같은 아이’다. 성숙한 어른은, ‘어른 같은 아이’다. 나의 싸움은 어른이 되지 않으려는 싸움이었다. ‘아이 같은 어른’이 되지 않으려는 싸움이었고, ‘어른 같은 아이’로 남으려는 싸움이었다. 나는 내가 싫어했던 어른이 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어쩌면 그 선택이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2.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나는 왜 이 수업을 하는가? 돈을 벌려고? 아니다. 돈을 벌려면 이 일은 안하는 편이 좋다. 이 수업에 소진되는 몸과 마음의 양으로 다른 일을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수업을 하는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글쓰기 수업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없어진 공책 때문에 불안에 떨며 슬픔에 잠겨 있을지 모를 ‘네마자드’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누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즐겁다고 하는가? 만약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즐겁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친구’가 없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진정으로 ‘친구’를 만나러 떠나 본 사람은 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된지.      


 왜 ‘아이 같은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아이 같은 어른’에게는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이마드’가 ‘네마자드’를 찾아 떠났던 길을 생각해보라. 그 길은 험하고 고된 길이다. 왜 그런가? 단순히 코케에서 포시테까지의 물리적 거리 때문인가? 아무리 ‘아이 같은 어른’이라도, 어른은 어른이다. 어른에게 물리적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다.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 험하고 고된 이유는, 내 친구의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사실에 있다. 포시테에서 ‘네마자드’ 찾기는 ‘서울에서 왕서방 찾기’ 만큼이나 막막하다. ‘아이 같은 어른’은 ‘친구’를 만날 수 없다. ‘아이 같은 어른’은 갈 곳이 정해졌을 때만 길을 떠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 곳이 정해진 길에 ‘친구’는 없다.       


 글쓰기 수업은 힘들다. 12주간의 물리적 시간 때문이 아니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기에 그 정도는 견딜 만 하다. 정작 힘든 것은, 이 수업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글쓰기 수업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수업이 아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수업에서 나는 늘 막막하다. ‘내 친구의 집’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여 도착한 곳이 더 큰 슬픔을 주는 엉뚱한 곳이거나 혹여 숙제 검사 전까지 공책을 돌려주지 못하면 어쩌나 늘 조마조마하다.      


 내 친구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지나, 올리브 나무를 지나 포시테로 달려가는 마음. 이것이 ‘이마드’의 힘이고, ‘아이 같은 어른’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이마드’처럼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내 친구의 집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고통스러워할 친구를 위해 일단 포시테로 달려가는 ‘이마드’처럼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나는 그렇게 누구인지도 모를 그 ‘친구’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 


 ‘아이 같은 어른’으로 안주하고 싶을 때, ‘어른 같은 아이’가 되는 것이 버거울 때, 지각한 ‘이마드’를 생각한다. “포시테에 안 살면서 왜 늦었어?” “거기 살아요,” “포시테에서 왔다고?” “아니요....” 네마자드’의 집을 끝내 찾지 못해도 ‘이마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마드’는 한 숨도 자지 못했을 테다. 밤새 ‘네마자드’의 숙제를 대신 했을 테고, 새벽에 포시테로 달려갔다 다시 학교로 왔을 테니까. ‘네마자드’의 공책에 끼워져 있는 작은 꽃이 그리도 예뻐보인 이유는, 그 작은 꽃에 친구를 찾아가려는 ‘이마드’의 땀과 눈물이 서려 있기 때문일 테다.      


 나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이 같은 어른’이 되지 않으려는 싸움. ‘어른 같은 아이’가 되려는 싸움. 그 싸움을 멈출 수 없다. ‘이마드’처럼, 나 역시 ‘꽃’ 한 송이를 담은 ‘공책’을 들고 어디인지 모를 내 친구의 집을 찾아 다시 떠나야만 한다. 턱 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지 않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지나, 올리브 나무를 지나, 다시 좁디좁은 골목 사이를 멈추지 않고 달려가야만 한다. 내 ‘친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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