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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파리(2011)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 우디 앨런

우디 앨런 : 미국의 코메디언, 각본가, 배우, 감독. 대표작으로는 『애니홀(1977)』, 『맨해튼(1979)』,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5)』, 『한나와 그 자매들(1986)』, 『범죄와 비행(1989)』, 『매치 포인트(2005)』, 『미드나잇 인 파리(2011)』 등이 있다. 우디 앨런의 작품 속 주인공은 대부분 자신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영화의 주인공은 우디 앨런의 분신인 셈이다. 『애니홀』에서 나약하고 소시민적이고 분열적인 주인공은 우디 앨런의 내면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된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독히도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 우디 앨런은 자신의 내면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다.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죽음마저 잊게 만든다네. 두려운 건 사랑하지 않거나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야. 용감하고 진실한 사람이 죽음과 맞설 수 있는 건 열정적인 사랑 때문이라네. 죽음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기 때문이지. 물론 두려움은 언젠가 돌아오지. 그럼 또 뜨거운 사랑을 해야 하고.” 『미드나잇 인 파리』의 헤밍웨이가 한 말 조용히 듣고 있었던 ‘길’은 다름 아닌, ‘우디 앨런’ 아니었을까. 인간이 나약해지고, 소시민적이 되고, 분열적이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온다. 그 근원적인 공포를 극복할 방법을 우디 앨런은 ‘진짜로’ 찾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노 감독이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열정적이 사랑을 시작하려고 했던 이유 아니었을까. 노 감독은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거장이 되었다. 




      

“황금시대를 잊지 말라! 그리고 그 속에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지루함을 견뎌라! 그렇게 우리의 황금시대가 열린다.”     


1. 

1920년대 파리. ‘길’의 ‘황금시대’다. ‘길’은 헐리우드에서 성공한 각본가다. 하지만 무엇인가 공허하고 불안하다. 상업적인 영화 이야기를 쓰는 일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은 예술적인 영혼이 숨 쉬는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이 ‘길’이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다. 자신이 동경했던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 ‘달리’ ‘루이스 부뉴엘’ 같은 거장들이 걸었던 거리를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 ‘길’에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자정(미드나잇)에 1920년대식 푸조를 타고 파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길’은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황금시대’로 돌아갔다. 자신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거장들을 직접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글이 어떤지 평가마저 받을 수 있게 된다. ‘길’은 얼마나 기뻤을까? 그 기쁨은 단순히 동경의 대상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다. ‘길’이 살고 있는 2010년대는 ‘길’을 이해해줄 사람이 없다. 적어도 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분명 그렇다.      


 장인도, 장모도, 심지어 아내도 파리에 살고 싶다는, 순수문학을 하고 싶어 하는 ‘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네들이 꿈만 같았던 황금시대를 다녀온 ‘길’의 들떠하는 표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그래서다. 그들은 ‘예술’이 아니라 ‘자본’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본화된 예술만이 존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길’의 들떠하는 표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1970년대 프랑스. 나의 ‘황금시대’다. 들뢰즈, 푸코, 알튀세르, 사르트르, 라캉. 이들을 얼마나 동경했던가. 이름만 들어도 설렜던 이들이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니! 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동경했고 사랑했던 그들이 걸었던 거리를 나도 한 번 걸어보고 싶다는 바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법이다. 나에게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느 초가을 자정 즈음, 『감시와 처벌』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 날 밤, 나는 푸코를 만났다. ‘길’처럼, 나의 ‘황금시대’의 모든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 더 없이 좋았겠지만, 푸코를 만났던 것만으로도 좋았다. 나의 ‘황금시대’로부터 돌아와서 알았다. 그날 밤의 여행이 왜 그리 좋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2014년에는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도, 부모도, 가족 모두 철학을 하고 싶어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꿈만 같았던 황금시대를 다녀와 들떠하는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철학’이 아니라 ‘자본’의 시대를 살고 있었으니까.

      

 ‘황금시대’로 돌아간 ‘길’은 행복을 찾았을까? 아니다, ‘길’은 ‘황금시대’ 속에서 또 한 번의 ‘황금시대’로 떠난다. ‘길’의 황금시대(1920년대 파리)에서 다시 ‘아드리아나’의 황금시대(1890년 파리)로. ‘아드리아나’의 황금시대의 존재들(로트렉‧고갱‧드가)은 자신의 시대가 누군가에게 ‘황금시대’인 것을 모른다. “이 세대는 공허하고 상상력이 없죠. 르네상스시대가 낫죠.” ‘아드리아나’의 황금시대에 사는 ‘고갱’은 자신의 황금시대는 르네상스였다고 불만인 듯 말한다.


 ‘길’은 황금시대를 횡단하며 알게 된다. 황금시대 역시 크고 작은 일로 고민하고 번민하며, 또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시대임을. 자신이 동경했던 모든 이들 역시 자신처럼 그네들의 현재(황금시대)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들 역시 자신만의 어느 황금시대를 갈망하고 있다. 자신의 황금시대에 머물겠다는 ‘아드리아나’에게 ‘길’은 말한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되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를.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족스럽죠. 삶은 그런 거니까요,”


      

2.

‘황금시대’에 기쁨은 없다. ‘황금시대’는 없는 것을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황금시대는 지금 내게 없기 때문에 동경하는 것일 뿐이다. ‘길’이 1920년대 파리를 동경했던 것은 2010년에 예술이 없었기 때문이며, 내가 1970년대 프랑스를 동경했던 것도 2014년에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없는 것을 보려는 모든 시도는 공허와 허무에 가닿을 뿐이다. 없는 것은 없으니까.  우디 앨런이 『미드나잇 인 파리』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과거의 황금시대로 돌아가 현재를 보라”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디 앨런의 이야기를 “황금시대도 고민과 번민, 지루함으로 얼룩진 시대니 현재에 만족하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런 통속적 해석은 불행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도구 일뿐이다. ‘길’은 황금시대가 환상임을 깨닫는다. 결여가 만들어낸 환상. 하지만 “그래 어디든 다 똑같아. 지금처럼 사는 게 최고지.”라며 주어진 현실에 억지스레 순응하려 하지 않는다. ‘길’은 파혼하고, 파리에 머물며,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 


 ‘길’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자신만의 ‘황금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금시대는 분명 환상이다. 현실의 결여가 만들어낸 환상. 하지만 그 영혼을 뒤흔들었던 ‘과거’(황금시대)가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된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건 환상(황금시대)이다. “내가 원하는 삶은 예술가들의 삶이지” “내가 원하는 삶은 철학자들의 삶이지.” 이런 환상이 없다면 우리는 점점 더 조여 오는 현실에서 어떻게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완성된 소설이 마음에 들어요. 다만 한 가지가 걸리는데, 어째서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약혼녀가 현학적인 남자랑 바람피우는 걸 모를 수 있는 거지?” 자기기만적인 그래서 불행한 현실을 꿰뚫는 황금시대의 ‘헤밍웨이’가 없었다면, ‘길’은 어떻게 안정적인 하지만 질식할 것 같은 결혼을 끝낼 수 있단 말인가? 길은 과거이자 환상인 ‘황금시대’로부터 구원을 받은 셈이다. 이는 뒤집어 말해, 우리에게 우리만의 ‘황금시대’가 없다면 질식할 것 같은 현실로부터 구원받을 길이 요원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낭만적인 사랑이 시작되며 영화는 끝나지만 파리에 남은 ‘길’의 삶은 이제 시작이다. ‘파리’(예술)의 삶은 ‘헐리우드’(자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먹고 사는 문제로 늘 고민해야 할 것이며, 글이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해 번민해야 할 것이며, 그 고민과 번민을 늘 끌어안은 채로 지루한 일상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 고민과 번민 그리고 지루함이 삶 그 자체이며, 바로 그것이 ‘황금시대’를 ‘황금시대’이게 만드는 힘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길’은 자신만의 황금시대를 열게 될 테다.   

   

 나는 한 번도 철학의 ‘황금시대’를 잊은 적이 없다. 그 황금시대 덕분에 나는 겨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젠 예전만큼 1970년대의 프랑스에 가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다. 들뢰즈, 푸코, 알튀세르, 사르트르, 라캉이 1970년대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2020년대 ‘철학흥신소’에서 고민과 번민 그리고 지루함을 견뎌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시대’를 잊지 않고, ‘황금시대’ 속에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지루함을 견뎌 나갈 때, 비로소 자신만의 ‘황금시대’를 열 수 있다.      


 “당신의 황금시대는 언제였나요?”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하게 답할 수 있다. 2021년, 여덟 편의 영화와 씨름했던, 뜨거웠던 여름이 나의 ‘황금시대’다. 고민, 번민, 지루함을 견디며 영화에 대해 힘껏 썼고 또 누군가 썼던 글을 힘껏 읽었던 2021년, 철학흥신소에서 뜨거웠던 여름이 바로 나의 황금시대다. 나의 ‘황금시대’가 누군가의 ‘황금시대’가 되었길 바란다. 그렇게 고민과 번민 그리고 지루함을 견디며 ‘황금시대’를 함께 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두 웃으며 샴페인을 들라! “철학흥신소는 밤마다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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