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탄(Titane, 2021) 쥘리아 뒤쿠르노
쥘리아 뒤쿠르노 : 프랑스 여성 영화감독. 줄리아 뒤쿠르노는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역대 두 번째 여성감독이다. 그녀는 유럽예술 영화감독 중에서 다소 예외적으로 (지금까지는) ‘바디 호러Body Horror’적인 장르물을 연출했다. (전작 「로우」 역시 그렇다.) 그래서인지 많은 평론가들이 뒤쿠르노를 장르 영화감독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적절한 평가가 아니다. 그녀는 어느 인터뷰에서 「티탄」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고민을 밝힌 바 있다.
“내게 가장 어렵고 도전적이었던 일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전혀 다른 개념에도 마음을 열어주는 감정이에요. 사랑은 우리가 결정론에서 벗어나게 돕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게 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요. 그래서 저는 사랑을 영화로 표현하기 어려웠어요. 그것은 느끼고 경험해야 하는 거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로 풀어내면 그 감정이 줄어들거나 하찮게 될 것 같았어요. … 그래서 대사 없이 캐릭터의 경험을 느끼게 하는 것은 나에게 정말로 큰 도전이었죠. 사랑을 모르고, 사랑을 빼앗기고,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어떤 감정도 보여줄 수 없는 주인공으로 그 이야기를 해야 했어요.”
그녀에게 장르는 인간과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 일뿐이다. 장르물은 예술영화가 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장르 안에서 예술을 표현할 수 있고, 예술이 장르를 품을 수 있다. 예술은 무엇인가? ‘괴물’이다. 인간의 고통과 연민, 사랑의 상처와 혼란은 ‘괴물’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예술이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을 가로질러 그것들을 마주치게 할 때만 드러나는 이유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처럼. 그녀의 작품은 ‘괴물’이다.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여성‧성전환‧살인‧기계‧피‧기름‧부모‧섹스…)이 무작위로 들러붙어 만들어진 괴물. 그녀 역시 괴물이다. 규정하지 않은 채로 많은 것들(장르‧예술‧영화)을 이어붙이며 살아가고 있다. “괴물을 받아들여줘서 감사하다” 「티탄」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그녀 수상 소감이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도, 그녀 자신도 괴물임을 긍정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도 예술도 긍정하고 있다. 그녀의 영화는 우리시대 예술 영화의 최전선이다.
“절박해서 사랑하는가? 사랑해서 절박해지는가?”
1. 여성성, 상처받은 잠재성!
‘알렉시아’는 왜 괴물이 되었을까?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해서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으려 했던 어린 마음은 차가운 ‘티탄(티타늄)’이 되어버렸다. 티탄이 되어버린 알렉시아의 차가운 마음에 남은 건 분노다. 겁탈하려는 듯 일방적 키스를 하려 했던 남자를 살해한다. 알렉시아는 자신의 머리에 꽂고 있던 ‘자지’(비녀)를 그 남자의 귀에 꽂아버린다. 이제 진짜 ‘티탄’이 되어버린 알렉시아는 아버지가 아닌 자동차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자동차 앞에서 관능적인 춤을 추고 자동차와 섹스마저 나누게 된다.
그렇다면 알렉시아는 아버지의 사랑 너머 자신을 사랑을 찾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동차는 아버지의 상징일 뿐이니까. 알렉시아에게 자동차는 아버지의 대리인일 뿐이며, 자동차와의 섹스는 그 대리인과의 섹스일 뿐이다. 이제 알렉시아의 광기어린 증오의 정체를 알겠다. 알렉시아의 증오는 당연하다. 그 증오는 아버지를 향한 증오도 아니며 일방적인 키스를 했던 남자를 향한 증오도 아니다. 바로 자신을 향한 증오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를 다시 사랑하게 된, 아니 그 존재밖에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 이의 증오를 알고 있는가? 그런 증오는 광기가 된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남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호의적인 이들마저 참혹하게 살해하는 광기. 아버지 밖에 사랑할 수 없어서 자동차(기계)를 사랑하게 된 알렉시아는 그렇게 차가운 광기의 괴물이 된다. 괴물은 광기는 멈추지 않는다. 알렉시아는 불을 질러 아버지마저 죽인다. 이 일로 알렉시아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렇게 ‘알렉시아’는 ‘아드리앙’이 된다. 그녀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머리 깎아 남성이 된다. 머리 있던 ‘자지’(비늘)를 마음에 담아 남성이 되었다.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된 ‘그’는 이제 주체적인 인간이 된 것일까? 지독히도 증오했던 아버지를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주체적인 인간이 된 것일까? 그 ‘아드리앙’이 된 ‘알렉시아’ 앞에 또 다른 아버지가 나타난다. 소방서 서장 뱅상이다.
뱅상은 오래전 실종된 아들, 아드리앙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그에게 기적처럼 아드리앙이 나타났다. ‘뱅상’에게만 ‘알렉시아’가 잃어버린 아들이었을 뿐, ‘알렉시아’에게 ‘뱅상’은 연쇄살인마가 아닌 무고한 시민의 보증서일 뿐이다. 하지만 ‘뱅상’은 ‘아드리앙’을 진심으로 사랑해준다. ‘알렉시아’는 정작 여성일 때 받아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남성이 되어 온 몸으로 받게 된다. 그렇게 ‘티탄’은 조금씩 다시 ‘인간’이 되어간다. 아버지 때문에 불로써 사람을 죽이던 ‘티탄’은 아버지 때문에 불로부터 사람을 구하는 ‘인간’이 된다.
알렉시아는 네 번의 변화를 겪는다. ‘여성→티탄→남성→인간’ 다시 ‘인간’이 된 알렉시아는 어떤 모습일까? 다시 ‘여성’이다. ‘아드리앙’(남성)이 된 ‘알렉시아’는 ‘뱅상’을 사랑하게 된다. ‘뱅상’은 어떤 사람인가? 소방서에서 ‘신’으로 군림하는 남성성의 상징이며, 그 남성성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스테로이드를 맞아야 하는 마초 중에 마초다. ‘알렉시아’의 생부는 ‘뱅상’에 비하며 여성적으로 비춰질 정도다. 지독히 남성성을 거부했던 ‘알렉시아’는 그런 ‘뱅상’을 사랑하게 된다.
여성성은 무엇인가? 남자로 태어나 남성으로 길러진 나는 이 질문을 긴 시간 고민했다. 그 긴 시간을 지나 여성성을 나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상처 입은 잠재성! 여성들은 상처 입는다. 하지만 그 상처 때문에 여성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여성성이 바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잠재성이기 때문이다. 알렉시아는 ‘여성’을 지나 ‘티탄’으로, 그를 지나 ‘남성’이 되었다. 알렉시아는 미소 짓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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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아는 소방차 위에서 다시 섹시 댄스를 추었을 때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된다. 누구도 치유할 수 없었던 ‘뱅상’의 마음을 누가 치유해주었던가? 그것은 아이를 낳은 ‘알렉시아’ 아니었던가? 여성성은 상처받은 잠재성이다. 상처받은 ‘여성’들은 ‘티탄’이 될 수 있고, ‘남성’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다시 ‘여성’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철없는 마초들의 엄마가 되어 ‘남성’들 또한 ‘티탄’을 지나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랑해서 더 ‘인간’다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2. ‘절박해서 사랑하는 마음’ 너머 ‘사랑해서 절박해지는 마음’으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티탄’을 지나 ‘여성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두 말 나위도 없이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알렉시아’는 어떻게 여성성을 회복했을까? 철없는 마초인 ‘뱅상’은 어떻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까? 사랑이다. 절박한 사랑. ‘뱅상’은 ‘알렉시아’를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아드리앙’이 아님을 정말 몰랐을까? ‘알렉시아’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녀가 아들이 아님을 정말 몰랐을까?
절박한 사랑을 해본 적 있는가? 절박한 사랑에는 두 마음이 있다. ‘절박해서 사랑하게 되는 마음’과 ‘사랑해서 절박해지는 마음’이다. ‘알렉시아’를 처음 만났을 때의 ‘뱅상’은 전자다. 자식을 잃어버린 아비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는가? 그 절박함은 세상 그 어떤 절박함에도 비할 바가 없다. 그런 절박함은 눈을 가린다. 이것이 ‘뱅상’이 ‘알렉시아’가 ‘아드리앙’이 아님을 알아채지 못한 이유다. 아니 온 힘을 다해 그녀가 아들이 아님을 알아채지 않으려고 노력한 이유라고 말해야 할까?
세상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절박함으로 눈이 가려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세상 사람들은 뱅상에게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 그녀는 ‘아드리앙’이 아니잖아!”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은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과자와 사회에서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장애인이 있다. 전과자는 지독한 삶의 고통과 지독한 외로움 때문에 삶의 절벽에 섰다. 그 자살의 문턱에서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장애인을 만났다. 그녀가 따뜻한 미소로 차 한 잔을 건넸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그런가? 그것은 정말 사랑이 아닌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전과자와 장애인의 절박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뱅상과 아드리앙(알렉시아)의 절박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에 가까울 수 있다. 사랑은 오직 절박한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물론 이 절박한 사랑, 즉 ‘절박해서 사랑하게 되는 마음’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이는 충분한 사랑은 아니다. ‘절박해서 사랑하게 되는 마음’은 슬픔을 줄여 상대적 기쁨으로 가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절박한 사랑은 언제 충분한 사랑이 되는가? 달리 말해 언제 더 큰 기쁨으로 향하는 사랑이 되는가? ‘사랑해서 절박해지는 마음’이 들 때이다. ‘알렉시아’가 ‘뱅상’을 사랑하게 된 것은 언제일까? ‘절박해서 사랑하게 되는 마음’을 느꼈을 때일까? 그렇지 않다. 자신이 아들임을 착각하며 받는 사랑이 충분한 사랑일리 없지 않은가?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넌 내 아들이야. 앞으도로 계속.” ‘뱅상’이 ‘알렉시아’가 ‘아드리앙’이 아님을 알게 된 이후에 ‘알렉시아’에게 해준 말이다. 바로 이 순간이 ‘알렉시아’가 ‘뱅상’을 사랑하게 된 때이고, 동시에 ‘뱅상’이 ‘알렉시아’를 사랑하게 된 때다.
사랑은 무엇인가? ‘절박해서 사랑하게 되는 마음’ 너머 ‘사랑해서 절박해지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탈존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넘어 끊임없이 새로운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전통적인 성역할을 넘어 ‘제 3의 성’(양성애‧동성애‧트랜스젠더‧드랙…) 역시 인간의 본질이 되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과 기계를 넘어 ‘제 4의 성’ 역시 인간의 본질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알렉시아’가 피 대신 기름을 흘리며 낳은 아이는 문학적‧신학적 상징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그만큼 기계와 충분히 가까워져있으니까 말이다. (인공지능‧인공관절‧인공로봇…)
인간이 어디까지 탈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탈주된 존재가 어떤 존재일지라도 하나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랑이 없다면 그 존재는 무의미해질 것이란 사실이다. 절박한 사랑.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괴물이 되어버린 ‘알렉시아’도, 아들을 잃어 자신마저 잃어버린 ‘뱅상’도, 더 나아가 기계와 섹스해서 낳은 기름 범벅의 ‘아이’라도 상관없다. 절박한 사랑이 있다면, ‘알렉시아’도, ‘뱅상’도, 그 ‘아이’도 ‘티탄’이 아니라 ‘인간’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건, 우리에게 어떤 삶의 조건이 펼쳐지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절박해서 사랑하는 마음 너머, 사랑해서 절박해지는 마음. 그 절박한 사랑.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더라도, 그 사실만은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