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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성찰 없는 철학은 악이다.

철학을 공부한다면 아프게 자기성찰을 하고,
그럴 수 없다면 철학은 공부하지 않는 게 좋다.


철학을 왜 공부하는가? 아니 철학은 왜 중요한가? 이 질문의 답은 ‘철학은 왜 어려운가?’에 대한 답과 같다. 철학을 공부하는 데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철학의 중요성 역시 다양한 이유들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철학의 본령에는 성찰이 있다. 자기 자신을 아프게 되돌아보는 자기성찰. 이것이 철학이 어려운 이유다. 


 철학은 타인과 세상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하여, 철학을 공부하면 타인과 세상의 맨얼굴을 보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난해하고 낯선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다소 수고롭고 피곤한 일일 수 있으나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철학 역시 그냥 하다보면 알게 된다.       


 그렇다면 철학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철학은 자기성찰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타인과 세상을 날카롭게 해부하려했던 시선이 바로 자신을 향하게 된다. 이것이 철학이 어려운 진짜 이유다. 타인과 세상을 해부하는 일은 때로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을 해부하는 것은 불쾌하고 아프게 짝이 없는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면 인간 언어의 기만성을 날카롭게 해부할 수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공부하면 인간의 무의식을 날카롭게 해부할 수 있다. '들뢰즈'를 공부하면 차이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날카롭게 해부할 수 있다. 이는 약간의 수고와 노력이 있다면,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이는 오히려 타인과 세상을 움켜쥘 수 있다는 기만적 흥분마저 선사한다. 하지만 이런 기만적 흥분에만 머문다면 철학은 공부하지 않는 게 낫다.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고 자신의 언어적 기만성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는 이. '프로이트'와 '라캉'을 공부하고 자신의 뒤엉키고 혼란한 무의식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는 이. '들뢰즈'를 공부하고 (자신과 다른)차이를 긍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 이들은 철학이 자기성찰로 와 닿는 것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철학은 언제나 타인과 세상을 해부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들을 이해한다. 철학이 자기성찰로 와 닿을 때 얼마나 아픈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이 무엇인가? 자신의 어둠에 직면하는 일 아닌가. 자신의 단점, 피해의식, 트라우마를 성찰하는 일은 얼마나 불쾌하고 또 아픈 일인가. 타인의 무의식과 그에 따른 성적 취향과 욕망에 대해서 떠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무의식과 그에 따른 성적 취향과 욕망에 대해서 성찰하는 것은 불쾌하고 아픈 일이다. 그것을 피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게 낫다.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자기성찰 없는 철학은 결국 공허함을 남길 뿐이다. 그리고 그 공허함으로 타인과 세상을 해부려 하려 할 때, 철학은 크고 작은 상처주는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자기성찰 없는 철학은 타인과 세상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해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날카로운 '칼'이다. 그런데 그 칼은, 손잡이가 아니라 칼날부터 쥐어야 하는 칼이다. 손잡이는 칼날을 쥔 손의 상처가 아물 때 쥐어야 한다. 그 상처에서 돋아나는 새살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철학으로 아프게 자기성찰을 한 이에게만 타인과 세상에 대한 갚은 '사랑'이 돋아난다. 그 '사랑'으로 타인과 세상을 해부할 때 비로소 철학은 ‘메스’가 된다. 철학을 공부한다면 자기성찰을 하고, 자기성찰을 할 수 없다면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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