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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치유'를 시작한 제자에게

1.

‘자기보정능력’이란 것이 있다. 복싱은 어려운 스포츠다. 그래서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연습하다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실력이 빠른 속도로 는다. 그 ‘어느 시점’은 언제일까? 사람마다 그 순간은 다르겠지만,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안다. ‘자기보정능력’이 생겼을 때다. 복싱을 처음배울 때는 아무 것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 무엇을 못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지도자가 걸음마부터 모든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때는 실력이 더디 향상 된다.

      

 하지만 계속 묵묵히 연습하다보면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어느 부분이 잘된 부분이고, 어느 부분이 잘못된 부분인지 보인다. 자기보정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자신의 발 위치, 상체와 하체의 자세, 주먹과 팔의 각도 등등. 미세하게 잘못된 부분을 스스로 보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이 ‘자기보정능력’이다. 이 능력을 갖게 되면 기량이 급격하게 향샹 된다. 복싱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자기보정능력’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의 문제다.



2.

기억도 흐릿한 시절에 부모로부터 버려졌던 제자가 있다. 나는 그 아이를 가르치면서 늘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 아이의 상처를, 아픔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부모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되, 충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내가 네 살도 채 되기 전에 절에 버려져 온갖 폭력에 시달렸던 아이의 마음을, 어린 시절부터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살아가야 했던 아이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아이는 여전히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나를 찾아왔다. 당연했다. 너무 깊은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는 법이니까. 나는 그 아이에게 해줄 말을 아끼고 또 아꼈다. 해줄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아이의 상처가 빨리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 또 다른 상처를 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얼마 전 그 아이에게 긴 편지가 왔다. 자신을 버린 엄마를 향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한 동안 너무 괴로웠다는 이야기로 편지는 시작되었다.      


 너무 깊어서 쉬이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가진 많은 이들이 그런 것처럼, 그 아이 역시 분노와 증오에 잠식당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일까?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다행히도, 그 아이는 자신의 분노와 증오가 흘러나갈 작은 홈을 파고 있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화가 많이 났어요. 아니 정말 미친 듯 괴로웠어요. 고민하고 분노에 휩싸이면서 저는 또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지금 분노를 느낄까?”


 

그 아이는 분노와 증오에 잠식당하지 않고, 그 분노와 증오를 거리 두어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었다. 이것은 ‘자기보정능력’이다. 그 아이의 글을 읽으면서 홀로 거울 앞에서 수도 없이 허공에 주먹을 날려대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한 참을 주먹질을 해대다 보니, 나중에 거울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어떤 부분이 잘 못되었는지 말이다. 그 아이도 한참을 감정의 토악질을 하다 보게 되었을 테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잘못된 모습이.


 복싱의 ‘자기보정능력’이 삶으로 전화轉化되면 ‘자기치유능력’이 된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보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 역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더욱 다행인 것이 있다. 복싱에서 ‘자기보정능력’이 기량을 빠르게 향상시키는 것처럼, 삶에서 ‘자기치유능력’은 상처를 빠르게 치유케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와 아픔들을 점검하고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매번 병원을 다녀야 하는 사람보다 더 빨리 치유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제 막 ‘자기보정’으로 ‘자기치유’를 시작한 제자에게 고마움과 축하를 전하고 싶다. 잘 배워주어서 고맙고, 근사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축하해주고 싶다. 앞으로 또 더 많은 상처와 아픔이 있겠지만, 그것 역시 스스로 ‘보정’해나가며 스스로 ‘치유’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언젠가 그 제자가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삶을 잘 사느냐 못사느냐는 ‘자기치유능력’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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