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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자격, 가르침을 가르칠 자격

 “To teach is to touch a life” 


‘가르칠 기회를 주고 싶다.’ 제자가 하나 둘 늘어나면서 종종 했던 생각이다. 가르칠 기회는 중요하다. 역설적이게도, 배움보다 가르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르침의 이유여서는 안 된다. 즉, 더 많이 배우기 위해 가르치려는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미성숙이며 폭력이다. 그것은 마치 성숙해지기 위해 사랑하려는 마음과 같다. 사랑을 하면 성숙해지는 것이지 성숙해지기 위해 사랑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미성숙하며 폭력적인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가르침에는 자격이 필요하다. 누구나 가르칠 수 있지만 아무나 가르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르칠 자격은 무엇인가? 달리 말해, ‘나는 어떤 제자에게 가르칠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일까?’ 꽤 오랜 시간 이 고민을 했다. 첫째는 앎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뭘 알아야 가르칠 것 아닌가.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일종의 사기다. 그러니 가르치려면, 모든 지식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은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는 성찰이다.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권력구도를 만든다. 즉, 가르치는 사람은 위에 서고, 배우는 사람은 아래에 서게 된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다하더라도, 이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주제넘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사람 중에 권력지향적인 사람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가르침에는 성찰이 중요하다. 위에 서 있는 자는 성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늘 자신을 되돌아보며 성찰하지 않는 선생은 그저 권력에 취해 떠들 뿐이다. 가르치려는 자는 성찰해야 한다.

   

 셋째는 사랑이다. 아니, 이것이 가르침의 유일한 자격일지도 모르겠다. 첫째(앎)도 둘째(성찰)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어를 잘 모르는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말을 가르친다고 해보자. 부모는 일단 좋은 한국어 책을 몇 권사서 공부를 할 것이다. 아이에게 혹여 잘못된 지식을 전달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은 앎은 구축하게 마련이다. 성찰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가 잘못된 말을 배울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은 성찰을 촉구한다.

  

 사랑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가르치지 않는 게 좋다. 사랑하는 마음만큼만 가르치는 게 좋다. 가르치려는 사람, 배우려는 사람 모두에게 그게 더 좋다. 가르친다는 것은 텅 빈 허공에 대고 떠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배우는 이의 고통스런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이는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나는 애정이 깊지 않는 이들에게 가르칠 자격을 부여할 수가 없다. 이는 순전히 미숙한 나 자신의 탓이다. 내가 섰던 자리에 다른 이가 서서 가르침을 전할 때 한 치의 시기와 질투도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없다. 나는 그정도로 주제파악을 못하는 선생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르침을 나 혼자 독점할 생각도 없다. 나는 그 정도로 후진 선생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선생의 자리를 넘겨주되, 시기나 질투가 있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모순된 이 상황의 해결책을 안다. 사랑하는 이에게 선생의 자리를 넘겨주면 된다. 아무리 미숙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이에게 시기와 질투를 하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가르침의 유일한 자격은 사랑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자격도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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