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랑도, 기다림도, 영원하지 않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다. 왜였을까? 아버지가 싫어서였을까? 아니다.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좋았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세상살이가 힘들어서였는지, 아니면 가족들보다 자신의 삶이 더 중요했던 것인지, 아버지는 거나하게 술에 취해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시거나 일찍 돌아오신 날은 티비 앞에만 계셨다. 나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진규야. 아빠랑 자전거 타러 나갈까?” 그 말 한마디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아마, 나는 그렇게 지쳐버렸을 테지.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서럽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더욱 서럽다. 어린 나는 그 서러웠던 시간에 지쳐 아버지와 조금씩 멀어져 간 거였겠지.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는 시간이 더 편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철이 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어긋남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다.” ‘아버지는 저를 사랑하지 않으셨어요.’라는 말에 아버지가 되돌린 말이다. 반만 옳은 이야기다. 사랑이 무엇일까? 시간이다. 만약, 사랑의 양을 잴 수 있다면, 그건 시간으로만 가능하다. 함께 하는 시간.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나와 함께 한 시간만큼의 사랑일 뿐이다. 이러저런 변명이나 핑계를 댈 필요 없다.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고, 사랑하는 만큼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니까.


 다 큰 어른이 된 나는, 또 누군가를 그렇게 기다렸다. 아버지를 기다렸던 것처럼. 하지만 내가 기다린 이들 중 대부분은 나의 기다림보다는 그네들 자신의 상처와 아픔만을 보고 있다. 그런 이들을 기다리며 그렇게 나는 또 조금씩 지쳐갔다. 그네들은 늘 자신만 보고 있었으며, 심지어 함께였던 시간 동안에도 늘 자신만 바라고 있었다. 매일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처럼, 늘 티비 앞에 있었던 아버지처럼.       


 아버지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 가족은 영원할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이었겠지. 허황된 믿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지치게 내버려둔 것일 테지. 아니, 기다리는 이들이 지쳐간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겠지. 그들은 언제나 당연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었을 테니까.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사랑은 언제나 동시적이다. 사랑을 준만큼 받을 수 있고, 받은 만큼 줄 수 있을 뿐이다. 서글프게도, 그렇게 '아버지'들과 사랑이 다시 어긋났다. 


 물론 그것이 '아버지'들의 잘못인 것은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나를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의무도 강요도 아니니까. 하지만 함께 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 그 관계가 어긋나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냥 그렇게 어긋난 것일 뿐이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기다림도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니까. 어긋난 사랑을 다시 억지로 이어 붙이려는 것보다 더 큰 폭력도 없겠지.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것일 뿐이지.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안다. 혹여 내가 누군가의 '아버지'는 아니였는지를 돌아보는 일이다. 지금 내가 누군가의 기다림을 알아채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되돌아보는 일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다. 그것이 철학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니,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작가의 이전글 가르칠 자격, 가르침을 가르칠 자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