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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흥신소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철학흥신소에 많은 이들이 왔고 또 떠났다. 왔던 이들이 왜 왔을까? 어떤 이는 ‘지식’을 원해서였다. 난해한 철학을 쉽고 대중적인 언어로 설명해줄 곳을 찾았던 이들이 왔다. 또 어떤 이는 ‘위로’를 원해서 왔다. 집, 학교, 직장 등등에서 상처 받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서있던 곳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해줄 곳을 찾다 여기까지 왔다.


 모순적이게도, 이것이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지식을 원했던 이들은 곧 떠났다. 나는 지식으로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가르치면서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그네들의 모습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자본주의를 가르치면서 돈에 집착하는 그네들의 모습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래서 지식만을 원했던 이들은 떠난다. 그것은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니까.     


 위로를 원했던 이들 역시 곧 떴났다. 나는 위로하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찾아오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네들을 사랑하려 애를 쓴다. 하지만 위로는 하지 않는다. 위로는 일종의 오만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인문적이지 못한 대화 방식이다. 위로 자체가 일종의 권력 관계다. “나는 너를 위로해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고, 너는 나에게 위로나 받을 만큼 하찮은 사람이다.”라는 마음이 위로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항상 위로 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언제나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해주세요” 그럴듯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징징거리는 나를 계속 위로해주세요.”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하찮은 사람의 자리에 두려는 이들은 떠난다. 나는 싸구려 위로 대신 죽비 같은 다그침을 내려치기 때문이다. 소심함으로 삶이 피폐해져서 찾아온 이들에게 대범함을 알려주지 않고 위로만 해주는 것.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은 이들에게 강건함을 알려주지 않고 위로만 해주는 것. 이 얼마나 기만적인 일인가. 나는 그런 기만적인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철학흥신소를 찾아오는 이들, 떠나는 이들, 남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철학흥신소는 삶은 없고 앎뿐인 지식을 배우는 곳도 아니며, 영원히 징징거리며 살려는 이들에게 싸구려 위로를 주는 곳은 더욱 아니다. 철학흥신소는 철학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피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곳이며, 그 상처와 아픔을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덜 주며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철학흥신소가 수행의 공동체이기를 바란다. 삶의 상처와 아픔을 피해 도망 오는 곳이 아니라, 그 상처와 아픔에 당당하게 맞서려는 이들의 공동체. 아파하며 진짜 삶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공동체. 그 힘든 수행을 기쁘게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공동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그런 곳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철학흥신소를 찾아오는 이들, 떠나는 이들, 남은 이들에게 언젠가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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