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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체, '나'의 긍정

'나'의 일관성을 해체하라. 그렇게 '나'를 긍정하라. 

“페이스북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피드를 내리며 세월호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다가, 1초 후엔 광고를 보며 자동차를 사고 싶고, 다시 1초 후엔 섹시한 이성의 사진을 보며 욕정에 휩싸이게 되잖아요,”      


 철학과 인문학을 꽤나 공부하는 G와 나눴던 대화였다. 그의 말은 옳을까? ‘페이스북’에 도배되는 분열적이고 파편적인 내용물들을 따라가며 우리의 정신은 파괴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중요하다. 이 질문은 “‘나’를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긍정은 매우 중요하다. ‘나의 긍정'은 세상살이의 '중심' 같은 것이다. '나'를 긍정하는 사람만이 변화무쌍하고 복잡미묘한 세상살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갈 수 있다. '균형'은 '중심'이 있어야 유지 가능한 것이니까.


 그래서 G도 ‘페이스북’을 문제 삼았던 것일 테다. 그 친구가 파괴된다고 했던 ‘인간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나’라는 의식이다. 1초 전에 세월호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다, 1초 후엔 자동차를 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다시 1초 후에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는 과정에서 ‘나’(라는 의식)가 파괴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즉, ‘나’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세상살이의 중심을 잃어서 균형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며(정신분열) 살게 된다는 의미다. G는 그것을 문제 삼았던 게다. 



 그렇다면, G는 ‘나의 긍정'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세월호에 눈물을 흘리려면 눈물만 흘리고, 자동차를 사고 싶을 때 그 마음만 있고, 섹시한 이성에게 눈이 갈 때 욕정만 있어야 한다. 그 일관성을 유지하는 시간이 짧으면 ‘나의 긍정’은 작은 것이고, 그 시간이 길면 ‘나의 긍정’도 커진다고 믿을 테다. 묻자. ‘나의 일관성'이 ‘나의 긍정'을 담보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을 긍정하기 어려울 테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 욕망이 복잡하게 뒤엉킨 존재다. 그래서 이성과 감정, 욕망은은 언제나 동시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은 그런 존재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이란 책에는 원주민 사회의 흥미로운 일화가 나온다. “장례식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음담패설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갑자기 울기를 그치고 피리를 손질하기 시작한다.” G라면 이런 원주민들에게 정신이 분열되었다고 말했을 테다. 장례식장에서는 엄숙하게 고인에 대한 애도만을 표해야지 거기서 음담패설을 하고, 물건(피리)을 수리를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비정상적이며 정신이 파괴되는 일일 테니까. 원주민들의 이와 유사한 사례는 많다. 어느 원주민들은 사냥을 하기 전에 경건하게 동물들에게 사죄를 한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되면 그 어떤 즐거운 놀이보다 즐겁게 사냥을 즐긴다.



 현대사회의 페이스북이 문제인 것도, 원주민 사회의 장례식 문화나 사냥 문화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그냥 그런 것이다. 때로는 고인의 애도 때문에 슬프다가 섹시한 이성을 보며 욕정에 휩싸이기도 하고, 때로는 동물(돼지)들에게 미안하지만 즐겁게 삼겹살을 먹기도 한다. 이런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과 욕망이 동시적으로 펼쳐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나’를 긍정한다는 것은 ‘나’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왜곡하는 일이고, 동시에 더 왜곡된 ‘나’를 만드는 일일 뿐이다. 


 ‘나의 긍정’은 '나의 일관성'을 해체할 수있을 때 이를 수 있다. 달리 말해, '일관된 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의 긍정'에 이를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을 긍정하며 세상살이의 중심을 잡고 절묘한 균형감각으로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명랑하며 유쾌한 삶이다.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야동을 보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마음-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 상태. 그 모든 것을 자연스러운 '나'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이 '나의 긍정'이며, 이것으로 명랑하고 유쾌한 삶이 가능하다. 


 ‘나’의 긍정이 없다면 삶의 기쁨은 없다. 나를 긍정할 때만, 진심으로 고인을 애도할 수 있고 진심으로 욕망(성욕, 소비욕등등)을 즐길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야동’과 ‘사고 싶은 물건들 목록’과 ‘가족들과 찍었던 사진’과 ‘사랑하는 이에게 썼던 편지’와 ‘시’와 ‘철학’이 난잡하게 섞여 있는 오래된 폴더다. 그것이 ‘나’다. 그 폴더를 보며 분열적 슬픔이 아니라, 그 일관적인 기쁨을 느낀다. '나'는 내가 좋다. '나'의  중심을 잡았기에, '나'의 균형으로 명랑하고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나'의 일관성을 해체하라. '나'를 긍정하라. 다시 '나'의 일관성을 조직하라. 난잡한 '나' 자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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