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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폭력'이다.

“철학은 폭력이다.
우리에게 기쁜 삶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황진규

     

철학은 인문주의의 정수精髓다. 그리고 인문주의의 정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철학의 사명 중 하나는 인간에게 가해진 폭력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는 분명 '폭력'적 요소가 있다. 나는 이것을 철학을 배우며, 또 가르치며 분명히 경험했다. 철학을 공부하며 두려웠던 적이 있다. 앎을 하나 더 할 때마다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내야 한다는 압박이 '폭력'처럼 느껴졌다.


 철학을 가르치며 똑같은 일을 겪었다. 내게 철학을 배우던 몇몇의 학생들이 떠나갔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내게(정확히는 내가 가르친 철학 혹은 철학을 가르치는 태도) 폭력성을 느꼈다고 했다. 철학의 폭력성 혹은 철학을 가르치는 나의 폭력성. 그것이 그네들이 떠난 이유였다. 그네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나는 분명 '폭력'적이었으니까. “지금처럼 계속 돈만 벌면서 살 거야?” “지금처럼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살 거야?” “지금처럼 계속 굽신거리며 살 거야?” 그것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다하더라도, 크고 작은 상처를 주는 '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철학은 폭력적인가?” 철학을 공부하며 또 가르치며 종종 물었다. 나의 답은 분명하다. 그렇다. 철학은 '폭력'적이다. 어찌 보면, 폭력적이지(강제하지) 않은 철학이 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성찰을 촉구하는 철학은 반드시 '폭력'적인 면이 있다. 미사여구만 늘여놓는 혹은 현학적인 개념만 늘어놓는, 달리 말해, 삶의 성찰을 촉구하지 않는 철학이 더 문제다. 그런 '폭력'적이지(강제하지) 않은 철학은 끝내 더 크고 깊은 공허와 허무 속으로 사람들을 밀어넣는 까닭이다.


 

 건강한 몸을 갖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이 무엇인가? 폭력이다. 근육을 찢는 폭력. 그 찢어진 근육이 회복되면서 튼튼한 몸이 된다. 집에서 편안히 뒹구는 운동으로는 튼튼한 몸이 되지 않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 운동은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정신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정신(마음)을 찢는 폭력이다. 그렇게 찢어진 정신이 아물며 튼튼한 정신이 된다. 이것이 미사여구나 현학적인 철학으로 정신이 결코 튼튼해지지 않는 이유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니까.


 물론 철학의 '폭력'이 모든 면죄부를 갖는것은 아니다. 운동의 폭력이 그렇듯, 철학의 폭력 역시 정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떠나려는 학생들을 붙잡지 않는 이유다. 철학의 폭력이 아무리좋다 한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폭력과 다름 없으니까. 아무리 좋은 운동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손에 끌려와서 하는 운동은 그 자체로 폭력이지 않은가.


 떠나려는 이를 붙잡지 않는다. 붙잡아서는 안 된다. 내가 '폭력'적으로 철학을 가르치는 이유는, 조금 더 씩씩하고 튼튼한 마음을 갖기를 바라서지, 회복될 수 없는 지경까지 마음을 찢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깜냥 껏 내게 배우는 사람들을 보살펴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근육을 찢었으면 회복되기 위한 영양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나의 폭력(철학)과 보살핌이 적절하지 못해 떠났던 사람들에게는 그저 미안하고 미안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폭력'을 멈출 생각이 없다. 앞으로도 철학을 '폭력'적으로 공부할 것이고, '폭력'적으로 가르칠 것이다. 모든 일에는 댓가가 따르듯, '폭력'적 철학을 선택한 댓가 치러야 한다.누군가에게 원망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도 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것이 나의 철학이니까. 하지만 그 댓가만으로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온 감각을 곤두세워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폭력이 어디까지인지 파악하려고 애를 써야겠지. 그리고 그렇게 가해진 그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잘 회복되도록 보살피는 노력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테지. 폭력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폭력 뒤의 성숙이 중요한 것이니까. 누가 뭐래도, 철학은 폭력이다. 아니 폭력이어야 한다. 철학은 슬픔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기쁜 삶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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