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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숙취

글로 또 말로 끊임없이 떠들며 산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나의 일이 좋다. 하지만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떠든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 ‘떠든다’는 것은 타인의 삶에 개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코 좋기만 한 일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적인 떠듦이든,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떠듦이든 마찬가지다. 그것은 모두 영혼이 휘발되는 일이다. 그보다 더 슬픈 일도 없다. 가끔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떠드는 것은 마치 술과 같다. 첫 잔은 음미이고, 둘째 잔은 기쁨이다. 하지만 그렇게 음미와 기쁨에 취해 한 잔 씩 털어 넣다보면, 어느 새 나는 없고 술이 술을 마시고 있다. 떠든다는 것이 그렇다. 사람을 사랑하려 시작한 한 마디는 음미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더욱 분명히 전해주려는 두 마디는 기쁨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태어진 한 마디, 두 마디는 어느 새 사람과 사랑은 없고 덩그러니 말만 남게 된다. 그렇게 영혼은 휘발되어 간다.


 말의 숙취.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쉴 새 없이 떠들어 본 이들은 안다. 정신이 없이 털어 넣었던 술이 다음날 한 없이 괴롭게 만들 듯, 쉴 새 없는 떠듦 역시 그렇다. 떠듦의 시작이 사랑이었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때 입을 닫을 정도의 성숙함은 있다. 하지만 사랑으로 시작된 말이, 사랑으로 마무리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한 마디가 한 마디를 부르고, 또 그 한 마디가 한 마디를 부른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끝에는 사랑이 아니라 상처가 아니었는지. 말의 숙취에 시달리는 지금, 스스로에게 아프게 물을 수밖에 없다.     


 철학을 공부하며 경계하며 균형 잡으려는 지점이 있다. “나는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거나 혹은 너무 엄격하지 않은가?” 너무 관대한 것도 문제고, 너무 엄격한 것도 문제다. 떠듦에 관해서도 그렇다. 나는 나의 떠듦에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떠듦에 너무 엄격한 것 아닌가? 떠드는 것을 업으로 삼은 내게 이 질문은 평생 저주처럼 나를 붙어 다니겠지. 


 하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그 저주 덕분에 해야 말 앞에서 침묵하는 비겁하거나 게으른 인간은 면할 수 있을 테지. 또 그 저주 덕분에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쉴새 없이 떠는 비루하거나 하찮은 인간은 면할 수 있을 테지.  나는 ‘금언禁言’과 ‘과언過言’이라는 두 팔로 균형을 잡으며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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