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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ulnerability(상처받기 쉬움)

 “상처받기 쉬워서 얼마나 다행인가!”


vulnerability(상처받기 쉬움). 이보다 더 간명하게 인간이란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의 피부를 생각해보라. 곰처럼 추위를 견뎌낼 털도, 악어처럼 날카로움을 견뎌낼 두꺼운 껍질도 없다. 인간의 피부는 ‘vulnerability’ 그 자체다. 작은 추위와 날카로움에도 한 없이 상처받기 쉽다. 인간의 몸만 그런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마음 역시 ‘vulnerability’ 그 자체다. 작은 외면과 비난에도 한 없이 상처받기 쉽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그렇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 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대로,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운 대로 상처받기 쉽다. 인간의 이런 존재론적 조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런 ‘vulnerability’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의 흔한 방법을 알고 있다.      


 곰처럼 따뜻한 털옷을 껴입거나, 악어처럼 두꺼운 갑옷을 걸치려 한다. 그렇게 우리는 외면과 소외 비난을 피하려 애를 쓰며 산다. 즉, ‘상처받기 쉬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는 지혜로운 방법일까? 그저 정신적 추위(외면·소외)와 날카로움(비난·거절)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아픔을 좋아하는 이는 없으니 이 또한 나쁜 방법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의 피부는 왜 상처받기 쉬울까? 민감하고 섬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크고 작은 상처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vulnerability’이라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픔’이 아니다. ‘사랑’이다. 민감하고 섬세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털옷과 갑옷을 입고서는 상대의 온기와 떨림을 느낄 수 없다. 털옷과 갑옷을 입고 섹스(사랑의 대화)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vulnerability’ 이는 ‘아픔’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의 조건이다.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섬세하고 예민하지 않다면 사랑할 수 없으니까. 인간의 조건이 ‘vulnerability’라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삶이 있다. 아프지 않기 위해 사랑을 포기는 삶. 기꺼이 아픈 삶을 껴안으며 사랑하는 삶.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기쁜 삶이라는 걸.


 물론 아픔을 피하는 삶 역시 기쁜 삶이다. 하지만 이는 소극적 기쁨이고, 끝내는 허무와 공허 속에 남겨지는 기쁨이다. 기쁜 슬픔. 이와 동시에 사랑하려는 삶은 슬픈 삶이다. 연약하게 짝이 없는 피부로 차갑고 날카로운 사람을 껴안으려는 삶은 너무 아프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슬픔은 적극적 기쁨이다. 끝내는 온기와 설렘, 평안으로 가득 찬 기쁨. 슬픈 기쁨.


 이것이 우리가 인간의 존재 조건인, vulnerability을 긍정해야 하는 이유다.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즉, 그런 민감함과 섬세함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피부는 털옷과 갑옷을 입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온 몸으로 껴안아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아픔이 두려워 성급하게 민감함과 섬세함을 교살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미련한 털복숭이나 갑옷입은 기사가 되고 싶지 않다.  여기저기 쓸려 생긴 피딱지를 보며 웃으며 말하며 살아 갈 테다. “상처받기 쉬워서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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