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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마음으로, 다시 처음부터

기쁜 마음으로, 다시 처음부터.


1. 

“형님은 왜 거울 앞에서 계속 원투 연습하세요?”     


 체육관에서 한 회원이 의아한 듯 내게 물었다. 질문의 의미를 안다. 그 회원은 내가 복싱을 오래했고, 프로 시합도 뛰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보기에 충분히 잘하는 것 같은데, 왜 거울 앞에서 초보처럼 땀을 뚝뚝 흘리며 기본자세를 연습하고 있는지 의아했을 테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딱히 명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얼버무렸다. “뭔가 조금씩 부족한 거 같아서요.” 얼마 뒤 어느 주짓수 관장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블루벨트는 주짓수 기술들의 조각들을 익히고, 퍼플은 그 기술의 조각들을 다양하게 이어지는 연결고리들을 단단하게 만드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브라운 벨트는 자신의 색을 거의 완성하는 단계 같아요. 그리고 블랙벨트가 되면 다시 기본기부터 되짚어나가고요.”     


 그는 주짓수 띠 체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복싱과 나의 철학을 되돌아 보았다. 나는 왜 다시 기본기를 연습하고 있었을까? 복싱에는 띠 체계가 없다. 즉,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줄 상징이 없다. 그저 매순간 상대와 주먹을 섞으며 상대의 실력과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는 체육관의 위계적 구조를 만들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좋은 점이지만, 자신이 어디 즈음 왔는지 성찰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단점이다.     


 복싱 기술의 조각들을 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의 연결고리도 몸에 익히고 있다. 그렇게 익힌 것들은 나의 복싱 스타일(색)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뭔가 조금씩 부족한 것처럼 느꼈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해 뭔가 전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세한 움직임, 호흡, 리듬이 조금씩 틀어져 전부 다 잘못된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거울 앞에서 초보처럼 기본기를 연습하고 있었던 게다.    


 띠가 없어서 몰랐지만, 복싱의 '검은 띠'가 된 것 아닐까? 이것은 민망한 자화자찬이 아니다. '검은 띠'는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하는 상태(1단!)이기 때문이다. 블랙벨트는 기본기로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니까. 그런 측면에서 이제 겨우 복싱의 시작점에 올라 선 것인 셈이다. 




2. 

‘형이상학이 뭐지?’ 얼마 전부터 머릿속에서 맴도는 질문이다. 형이상학. 형이상학. 얼마나 많이 떠들었던 이야기였나. “서양철학의 시작은 탈레스이고, 탈레스가 형이상학을 기초 세웠다. 하여 서양철학은 형이상학으로부터 시작된다.”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철학적 개념들이 다 낯설게 보였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고 조금 더 지나 혼란스러웠다. 왜 안 그럴까?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괜찮다. 아마 지금 나는 철학의 ‘검은 띠’ 어디 즈음 와 있는 것 일 테니까. 철학도 복싱처럼 띠가 없기에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요즈음 느낀 당황과 혼란은 사유의 퇴행이 아니라, 나의 사유가 한 걸음씩 잘 걸어오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임은 안다. 이것 역시 민망한 자화자찬은 아닐 테다. 나는 철학의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주짓수는 흰 띠에서 검은 띠까지 가는데 평균 7~10년이 걸린다고 한다. 돌아보니 내가 복싱과 철학을 진지하게 수련한 기간 역시 그 즈음이 된다. 철학에 띠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이제 겨우 '검은 띠'(1)가 된 것일 테다. 철학을 공부했던 긴 시간을 돌아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제 겨우 점(끝) 하나를 찍었으니 다시 긴 선(시작)으로 나아가려 한다. 철학을 시작했던 책들을 다시 펼쳤다. 여기저기 그어진 밑줄들. 간간히 적힌 글씨들. 멋모르고 철학을 시작했던 과거의 내가 있다. 기쁘다. 그 기쁜 마음으로 다시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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