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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돈이 된다. 다만.

탈레스의 '형이상학'

형이상학은 정말 돈이 안 되는가?     


이제 우리의 오해로 돌아가자. 서양철학이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서양철학이 형이상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철학이 돈도 안 되는 비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오해의 시작이었다. 형이상학을 아주 쉽게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것’(다양하고 개별적 존재들)을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이 되고, 실용적이라 믿는 학문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기계공학 8주 완성’, ‘주식투자 완정정복’, ‘직장에서 인정받는 컴퓨터 활용법’ 같은 책들을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이런 책들을 ‘실용서’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실용서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 실용서는 돈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주제라도 형이상학적 태도 접근하는 책들이 있다. “기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주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컴퓨터의 본질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은 이런 책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책은 우리네 일상과 동떨어진 돈이 안 되는 비실용적인 책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심각한 오해다. 


 철학의 오래된 오해를 바로 잡을 시간이다. 다시 ‘요하네스 휠스베르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형이상학은 특수(개별) 과학자들처럼 단지 존재의 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존재 자체를 다룬다. 형이상학은 제 1의 근거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춰져 있는 곤란한 영역에 까지 파고든다. 서양철학사 요하네스 휠스베르거     



‘실용서’는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형이상학은 실용적이지 않을까? 아니다. 오히려 흔해빠진 ‘실용서’들이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기계공학 8주 완성’을 읽고 기계공학을 완성한 사람이 있을까? ‘주식투자 완전정복’을 읽고 주식투자를 완전히 정복한 사람이 있을까? ‘직장에서 인정받는 컴퓨터 활용법’을 읽고 직장에서 인정받은 사람이 있을까?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드물 테다. 이처럼, ‘비실용적인 실용서’라는 역설이 넘쳐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존재의 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원하는 앎에 도달하려 했기 때문이다.

      

 휠스베르거의 말처럼, 어느 “존재의 한 한 부분만 잘라내어” 알려고 했을 때 우리는 “감춰져 있는 곤란한 영역까지 파고”들기 어렵다. 즉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돈벌이든, 실용성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알아야 가능한 일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것’만 공부하려는 이들은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없다. 진정한 앎에 도달하려면 탈레스가 기초 세운 형이상학적 생각의 틀이 필요하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본질)들을 파악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은(형이상학) 실제적인 목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서 추구하는 그런 앎이다. 탈레스가 얻으려고 애썼던 것은 바로 이런 앎이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이미 보통의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고 형이상학이고 철학이었다. 서양철학사 요하네스 휠스베르거     


 형이상학은 분명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 “실제적인 목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앎 자체를 추구하는 그런 앎”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문은 얼핏 실용적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것을 놓친 관점이다. “앎 자체를 추구하는 앎”(형이상학적 앎)은 이미 구체적인 대상들을 모두 꿰뚫은 다음에 도달할 수 있는 앎이다. ‘주식투자 완전정복’을 다 읽어도 “주식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주식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답할 수 있는 이들은 주식투자를 완전정복 할 수 있다.      



진정한 실용성은 형이상학에 있다.      


‘스티브 잡스’로 상징되는 아주 실용적이고 많은 돈을 버는 경영자들이 지극히 형이상학적 철학책을 부여잡고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는 탈레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추구했던 학문 “보통의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고 형이상학”이었다. 그런 그는 비실용적이며 돈도 못 버는 삶을 살았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이야기 한다.  

   

 탈레스는 가난하다고 비난받았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철학을 무용지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천문학에 밝던 그는 이듬해에 올리브 농사가 대풍이 들 것을 예견하고, 아직 겨울인데도 갖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보증금으로 올리브유 짜는 모든 기구들을 싼값에 임차했다고 한다. 그 뒤 올리브 수확 철이 되어 올리브유 짜는 기구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임차해둔 기구들을 자신이 원하는 값에 임대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정치학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비실용적이며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 비난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형이상학을 추구하던 탈레스 역시 돈을 못 번다고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형이상학은 결코 비실용적이지 않다. 형이상학은 모든 대상들을 관통하는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 아닌가. 형이상학을 추구했던 탈레스가 천문학에 밝았으며, 경제학(올리브유 기계 독점!)에 능통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모든 세부 학문의 근본 원리를 알고자 했으니까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찰할 수 있어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법이다.      


 

누가 철학을 돈 안 되는 학문이라 하는가! 철학은 비실용적이어서 돈이 안 되는 학문이 아니다. 돈을 버는 것이 철학의 관심사가 아닐 뿐이다. 여기에 진정한 철학의 실용성이 있다. 돈이 전부가 아님을,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해주는 앎보다 더 실용적인 앎이 어디 있겠는가. 철학은 그 시작부터 단 한 번도 비실용적이었던 적이 없다. 다만 우리가 오해했을 뿐이다. 탈레스는 철학의 시작부터 이런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탈레스는 원하기만 하면 철학자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정치학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삶의 하수, 중수, 고수가 결정된다. 삶의 하수는 ‘철학은 돈이 안 된다’고 단언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돈만 바라보느라 정작 돈조차 벌지 못한다. 중수는 철학의 진정으로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다. 이들은 철학의 가치를 알아봤지만 결국 돈에만 머무른다. 하지만 고수는 다르다.


 진정한 고수는 힘이 있지만 힘을 쓰지 않는, 정확히는 힘쓰는 것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삶의 고수 역시 마찬가지다. 철학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지만 돈을 벌지 않는 이들이다. 돈을 버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이들은 철학을 통해 돈 너머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시작으로 돌아가, 철학의 오해를 해소할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삶의 고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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