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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며 늙는다는 것

철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런 삶은 종종 살얼음을 걷는 기분일 때가 있다. ‘철학을 하며 산다’는 건, 앎이 곧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기쁜 일을 하며 살아가라.” “늙음을 슬퍼할 일이 아니라 아름다운 일이다.” 이런 철학적 앎을 많이도 공부했다. 또 그런 앎들을 얼마나 떠들며 살았던가. 하지만 인생은 야박하다. 앎이 삶이 되었는지는 아닌지는 오직 ‘사건’이 들이닥쳤을 때 알 수 있는 법이다.


 오늘 기쁜 일을 하느라 치러야 할 대가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또 젊음이 지나 진짜로 늙음이 찾아왔음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바로 얄짤 없는 '사건'이 들이 닥쳤을 때, 앎이 삶이 되었는지 드러난다. 그래서 종종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삶이 되지 못한 앎들을 공부하고 떠들며 살고 있었을까봐. 어찌 보면, 철학을 하며 산다는 건, 겸허히 '사건'을 기다리는 삶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적 삶이란 것은 그런 것 아닐까? 내가 아는 것들이 얼마나 삶이 되었는지 확인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겸허한 삶.


 한 달 전 즈음 스파링을 하다가 눈을 다쳤다. 왼쪽 눈이 흐릿하게 보였다. 늘 그랬듯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뿌옇게 보이는 증상은 계속되었다. 동네 병원을 찾았다. 계절성 안구건조증이라며 안약을 주었다. 1주일이 지났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다른 병원을 갔다. 검사를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계속 앞이 흐리게 보이면 큰 병원을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2주일이 지났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큰 병원을 갔다. 더 복잡한 검사를 이것저것 받았다. 의사는 나의 증상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건 노화증상이에요.”

“운동하다 다친 이후로 그런 건데요?”

“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화증상 중 하나인데, 환자분 같은 경우는 장기간 복싱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빨리 노화가 온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럼 계속 이 상태로 살아야 되나요?”

“네. 지금 보이는 시야에 적응하며 사셔야 됩니다.”     


 건조한 의사의 진단에 조금 우울했다. 이제 다시 맑고 선명한 시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그 우울은 이내 옅어졌다. 안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후회하지 않아서. 복싱을 하며 마음 한켠에 조마조마한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은, 다칠까봐서가 아니라 다친 것을 후회할까봐서였다. 혹여 이렇게 복싱을 하다가 몸에 이상이 왔을 때 복싱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 조마조마했다. 복싱을 했기 때문에 10년 정도 빨리 눈의 노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후회되지 않았다. 복싱으로 기뻤던 지난 ‘지금’들로 충분했다. 


 눈의 노화를 10년 늦추기 위해 복싱 없는 삶을 살 것인가? 싫다. 읽고 또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눈의 노화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나는 복싱을 할 테다. 지금 나는 그 어떤 후회도 집착도 하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테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기쁨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테다. 


 마음 한켠에 조마조마한 마음은 복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건은 나의 '철학하는 삶'에 관한 것이다. 앎이 삶이 되지 못했을까봐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사건’은 얼마나 다행인가. 내 나름으로 앎과 삶의 괴리를 잘 좁혀내고 있었음을 확인 받는 사건이었으니까 말이다. 조금 더 당당하게 철학하며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행인 '사건'이 모여 '철학하는 삶'의 자부심이 될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처음 가보는 병원을 나서며 길을 몰라 핸드폰을 켰다. 검사할 때 넣은 안약 때문인지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핸드폰을 눈앞에 까지 갖다 대도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시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앉았다. 웃음이 났다. 핸드폰 문자를 읽어달라는 부탁을 했던 어느 노인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은 늙음’을 확인받는 날, 우연히 ‘큰 늙음’을 경험하고 있는 내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은 늙어가는 내가 초라해서 나온  씁쓸한 웃음이 아니었다. 


 기쁨의 웃음이었다. 지금 찾아온 '작은 늙음' 뿐만 아니라 아직 찾아오지 않은 ‘큰 늙음’과 ‘더 큰 늙음’(죽음)마저 지금처럼 철학하는 삶으로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큰 늙음'도 '더 큰 늙음'도 모두 아름다운 일임을 ‘알고’ 있다. 그것이 삶이 되었는지 확인할 사건을 겸허히 기다리며 살면 된다. 나는 계속 이렇게 철학하며 살아가고 싶다. 이제 알겠다. 철학하는 삶은 살얼음을 걷는 삶이다. 하지만 삶은 아슬아슬한 슬픈 삶이 아니다. 감각을 열어 살아갈 있도록 촉발하는 역동적인 기쁜 삶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철학하는 삶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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