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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시즘'으로 당당해질 수 있다.

‘당당함=뻔뻔함+자기성찰’

‘욕심-공포’는 ‘인정욕구’라는 동전의 양면

   

먼저, 이 ‘욕심’과 ‘공포’는 ‘인정욕구’라는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욕심’이 커질수록, 무엇인가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도 커진다. 또한 이 ‘욕심’과 ‘공포’는 모두 ‘인정욕구’로부터 발생한다.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욕심’는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인정(관심·칭찬)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다. 무엇인가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그 공포는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인정(관심·칭찬)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공포’이다.     


 다시 묻자. 우리는 왜 사장 앞에서 위축되는 걸까? 사장에게 ‘인정’받아 세상 사람들(부모· 배우자·동료·친구·자녀··)의 ‘인정’을 얻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고 싶어서다. 동시에 사장에게 ‘인정’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공포’를 벗어나고 싶어서이다. 그렇다. 위축되고 당당해지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인정욕구’의 문제다. 이런 위축의 발생원리를 이해하면 시니시즘이 어떻게 당당함을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시니시즘’이 무엇인가? 사회가 지정한 관습·전통·교육·윤리 등을 넘어서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려는 삶의 태도 아닌가. 시니시즘의 핵심은 인정욕구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시니시즘’적으로 사는 이들은 욕심도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욕심은 없다. 또 사회가 지정한 관습·전통·교육·윤리를 넘어서려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잃을 공포도 있을 리 없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없다. 누구보다 디오게네스의 힘을 정확히 알아본 니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노페의 시민들이 디오게네스를 추방형에 처했을 때그는 무슨 말을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그들을 시노페에 남아 있어야 하는 형벌을 내리노라.” (중략해적들이 디오게네스를 잡아서 노예시장의 얼간이 돈주머니들’ 앞에 세웠을 때 디오게네스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서들 와서 그대의 주인을 사가게나!” 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 프리드리히 니체     



뻔뻔함과 당당함 사이


디오게네스는 그가 살았던 지역(시노페)로부터 추방당했을 때 당당하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무지랭이들만 남은 시노페에 남아 있을 형벌을 내린다!” 해적들에게 잡혀가 노예로 팔릴 운명 앞에서도 디오게네스는 당당하게 말했다. “얼간이들아, 너희들의 주인을 사갈 기회를 주겠노라!” 이것이 ‘시니시즘’의 당당함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사라진 적은 없다. 그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해지는 방법은 ‘시니시즘’을 통해, 일체의 인정욕구를 벗어버리고 길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인정욕구는 인간이란 존재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숙명 같은 것 아닌가. 이런 숙명 앞에서 어떻게 ‘시니시즘’적 개로 살 수 있을까? 비범한 디오게네스와 달리 평범한 우리들은 ‘시니시즘’을 체화하기 어렵다. 수행이 필요하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행. 이것은 수행이다. 사회적 관습·전통·교육·윤리를 내면화한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할 때 너무 쉽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많이 배우지 못해서, 취업을 못해서, 가난해서, 결혼을 못해서 위축되는 것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 아닌가.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은 뻔뻔해지기다. “넌 왜 대학을 안 갔어?” 많이 배운 이가 물으면 이렇게 답해주자. “많이 배운 놈들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해서요” “넌 왜 아직도 취업을 못했니?” 직장인이 물을 때 이렇게 답하자. “직장은 바보들이나 다니는 곳인 것 같아서요” “넌 왜 결혼을 안 하냐?” 아버지(어머니)가 물으면 이렇게 답해주자. “아버지(어머니)가 전혀 안 행복한 것 같아서요.” 이런 뻔뻔함이 필요하다. 이런 뻔뻔함이 없다면, 우리는 내면화된 사회적 질서가 남긴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당당함=뻔뻔함+자기성찰’이다.

      

하지만 뻔뻔함이 곧 당당함인 것은 아니다. 뻔뻔함에는 기만적 ‘정신승리’와 유아적 ‘어깃장’, 그리고 몰염치한 ‘후안무치’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취업이 하고 싶지만 취업이 되지 않아 “직장은 바보들이나 같은 곳이야”라고 말하는 기만적 ‘정신승리’와 유아적 ‘어깃장’을 당당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또 노인과 임산부를 앞에 두고 최소한 염치도 없이 노약자석을 차지하고 있는 후안무치한 이를 당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순히 부끄러움이 없다고 해서 모두 당당함인 것은 아니다.

      

 당당함은 무엇일까? 도식화하자면, ‘당당함=뻔뻔함+자기성찰’이다. 즉, 당당함은 뻔뻔하게 행동한 뒤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로 얻을 수 있는 지혜다. 뻔뻔함보다 성찰이 먼저와서는 안 된다. 부끄럽지 말아야 할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우리가 당당함이라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뻔뻔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자신의 뻔뻔함이 기만적 ‘정신승리’나 유아적 ‘어깃장’ 혹은 몰염치한 ‘후안무치’는 아닌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진정한 당당함을 얻을 수 있다. 니체는 디오게네스의 시니시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디오게네스는 철학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켰다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 프리드리히 니체     


 디오게네스는 뻔뻔한 개가 아니었다. 그는 당당한 철학자였다. 뻔뻔함과 자기성찰을 통해 일체의 인정욕구를 벗어던져서 진정한 당당함에 이른 철학자. 비범한 디오게네스의 삶이 평범한 우리에게 당당해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누구 앞에서든 뻔뻔해져라!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하라!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우리 역시 당당해질 수 있다. 그렇기 진정한 당당함에 이르렀을 때,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말처럼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다” 당당함이란 것은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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