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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잘못인가? 네 잘못인가?

‘내 잘못인가? 네 잘못인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매번 너무 쉽게 끝나 버리는 연애가 문제인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녀는 매번의 이별에서 질문한다. ‘내 잘못인가? 네 잘못인가?’ 얼핏 보면 이 질문은 의미 있고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 마치 잘못의 원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태도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짧고 잦은 이별이 ‘나’ 때문인지 ‘너’ 때문인지 파악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질문은 무의미하고 더 나아가 유해하기까지 하다. '내 잘못'과 '네 잘못'을 강박적으로 구분하려는 태도는 ‘위축감’과 ‘무책임’만을 오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할 때 심한 위축감에 빠지게 마련이다. 짧고 잦은 이별이 ‘내 잘못’이라고 여길 때 ‘나는 제대로 된 사랑은 영원히 할 수 없는 인간이야’라며 한 없이 위축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문제의 원인이 ‘네 잘못’이라고 생각할 때 심한 무책임에 빠지게 된다. 짧고 잦은 이별이 ‘네 잘못’이라고 여길 때, ‘이게 다 쓰레기 같은 인간을 만나서 그래’라며 지독히도 무책임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위축과 무책임. 우리네 삶을 슬픔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정서 상태다. 위축과 무책임은 모두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 위축된 이는 위축되었기에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하기 어렵다. 무책임도 마찬가지다. 무책임은 어떤 것도 나의 잘못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정당화해주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잘못인지 네 잘못인지를 강박적으로 따지는 이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이들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 탓을 하는 것도 남 탓을 하는 것도 내밀한 심리적 조작일 뿐이다. 능동적 실천을 회피하기 위한 심리적 조작. 문제가 생겼다면, 반드시 ‘내 잘못’과 ‘네 잘못’의 조합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굳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 싶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 잘못은 어디까지이며 네 잘못은 어디까지인가?’ 짧고 잦은 이별은 문제인가? 매일 같은 야근이 문제인가? 항상 주눅 들어 사는 것이 문제인가? 어떤 문제이든 그 문제에는 반드시 ‘내 잘못’도 있고, ‘네 잘못’도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둘의 비중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내 잘못'과 '네 잘못'을 지혜롭게 구별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위축되지도, 무책임해지지도 않는다. (그 둘을 구분했음에도 여전히 위축되거나 무책임하다면, 둘을 지혜롭고 구분한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인 부분만큼 책임지게 되고 ‘네 잘못’인 부분만큼 당당해질 테니까. 그 정당한 ‘책임감’과 ‘당당함’은 중요하다. 그것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를 벗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책임지려는 이는 책임지기 위해 무엇이든 해내갈 것이고, 당당한 이들은 당당하기에 무엇이든 해내가게 마련이다. 


 위축되고 무책임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 반면 정당한 '책임감'과 ‘당당함’을  갖고 사는 이들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 여기에는 대단히 복잡한 삶의 작동원리가 있는 게 아니다. 위축되고 무책임한 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기 쉽고, 정당한 책임감과 당당함으로 살아내려는 이들은 무엇이든 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삶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무기력!)에서 오고, 삶의 행복은 근본적으로 ‘무엇이든 해보려는 마음'(활력!)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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