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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과 오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크라테스의 '성찰'

슬픔의 원인, 위축과 오만 

    

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세상에는 다종다양한 슬픔이 있겠지만, 그 근본을 따져 물으면 결국은 두 가지 원인으로 귀결된다. ‘자신’과 ‘세상’이다. ‘세상’이 기쁨을 줄 준비가 되어 있어도, ‘자신’이 그 기쁨을 받아 안을 수 없으면 필연적으로 슬프다. 반대로 ‘자신’은 이미 기쁜 상태더라도, ‘세상’이 온갖 슬픔을 준다면 그 역시 슬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이런 일이 벌어질까? 위축과 오만에 빠져 있을 때 그렇다.      


 ‘기철’은 모자랄 것 없는 가정에서 좋은 부모와 함께 자랐다. 공부도 곧 잘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칭찬을 들었다. ‘기철’의 ‘세상’은 기쁨을 줄 준비가 된 ‘세상’이었다. 하지만 기철은 늘 슬펐다. 왜 그랬을까? 기철은 늘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기뻐야할 세상은 기철에게는 그저 한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세상일 뿐이었다. 스스로 위축된 이에게는 어떤 세상도 슬픔의 원인일 뿐이다.       


 ‘수민’은 반대의 경우다. 수민은 스스로 이미 충분히 기뻤다. 하지만 '세상'과 마주할 때면 슬퍼졌다. “넌 왜 항상 제 멋대로야?” “너 혼자만 잘났어?” 주변 사람들이 ‘수민’에게 비난과 힐난을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수민은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렇게 점점 슬픔에 빠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수민’은 오만했기 때문이다. 오만한 이는 늘 자신이 옳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스스로 기쁘다. 하지만 그 기쁨은 곧 슬픔으로 전락한다. 세상은 오만한 이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오만한 이는 오직 홀로 있을 때 기쁠 뿐, 타인과 함께 살아야 세상에서는 결코 기쁠 수 없다.      


 잘 산다는 것은 사실 별 것 아니다. 슬픔을 작게 기쁨을 크게 하며 살며 된다. 이것이 위축과 오만이라는 슬픔의 원인을 잘 극복해야 하는 이유다. 슬픔의 원인을 극복하는 만큼 기쁨은 커질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쉽게 슬픔에 휩싸이는 것은, 인간이 위축과 오만이라는 정서적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증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잘 살기 위해 결코 건너 뛸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위축과 오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 서양철학의 아버지


이 질문의 답은,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에게 들어보자. ‘위축과 오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그 유명한 말로 대답을 대신할 것 같다. “너 자신을 알라!”(이 말은 소크라테스 시대의 델포이 신전 입구에 있는 비문에 새겨진 문구이다.) 소크라테스의 답은 알 듯 모를듯하다.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모를 수는 있어도,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철학의 아버지’는 왜 그런 너무 당연해서 의아한 이야기를 했던 걸까?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자.

 

 소크라테스는 아네테의 중간 계층 시민이었고, 논쟁하며 일생을 보냈으며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탈레스가 철학의 시조始祖라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아버지다. 탈레스가 ‘철학’을 기초 세웠고, 소크라테스는 ‘철학함’을 기초 세웠기 때문이다. 탈레스가 ‘이론으로서 철학’의 시작을 알렸다면 소크라테스는 성찰하는 철학적 자세, 즉 ‘태도로서 철학’의 시작을 알렸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분야로 남아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영향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휠스베르거는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모습을 갖춘 철학 그 자체다그는 지성만 가지고 철학했던 것이 아니라살과 피를 가지고 철학했었다우리들은 그의 본질(존재전체 속에서진리가 무엇이며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그의 철학은 실존적인 철학이었다서양 철학사』 요하네스 휠스베르거

     

‘산파술’과 ‘반어법’의 ‘대화’

     

소크라테스는 ‘철학함’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는 ‘산파술maieutik’과 ‘반어법eironeia’의 ‘대화’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산파술은 산모의 출산을 돕는 것을 말한다. 산파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산모 스스로 아이를 낳는 것을 돕는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의문을 직접 해소해주기보다 대화를 통해 제자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그는 반어법를 통해 대화했다. 이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말에 모순을 스스로 발견하게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각색하면 이런 식일 테다. 

    

“스승님, 저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불행해졌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가난이란 무엇인가?”
“돈 때문에 고통 받는 것입니다.”
“부자들도 돈 때문에 고통 받는데, 그럼 그들도 가난한 것인가?”
“·····”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반어법’의 ‘대화’다. 소크라테스는 ‘산파술’로 제자가 아이(지혜)를 낳는 것을 ‘반어’적으로 도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짧은 대화에서 제자는 지혜로움에 한걸음 더 다가섰을 테다. 자신이 불행한 이유가 가난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쳤을 테고, 동시에 자신이 정말 불행해진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을 테니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대화’를 통해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나’를 진정으로 아는 것.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것이 지혜라고 생각했다.

      


“너 자신 알라!”의 진짜 의미

 

“너 자신을 알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는 이 말은 사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나를 안다’고 확신한다. 이런 확신은 대부분 틀렸다. 우리가 아는 ‘나에 대한 앎’은 무엇일까? ‘남자이며, 내성적이며, 경영학을 전공했고, 결혼했고, 아이가 둘이며, 주식을 공부하는 직장인이며····’ 이런 ‘나에 대한 앎’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이런 앎으로 정말 ‘나를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안다고 확신하는 ‘나에 대한 앎’은 반쪽짜리 일뿐이다.

    

 ‘나에 대한 앎’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 흔히 ‘나를 안다’고 말할 때의 앎은 ‘내가 아는 것’에 관한 것일 뿐이다.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 안다고 해서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건 반쪽짜리 앎이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앎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선규’는 직장인이다. 그는 ‘직장과 직장을 다니는 나’(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잘 모른다. ‘직장 밖과 직장을 다니지 않는 나’(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제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는 ‘무지의 자각’을 촉구하는 말이다. 쉽게 말해, ‘네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라!’는 것이다. 진정한 앎이라는 것은 ‘나’가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한 앎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의 무지’를 절절하게 깨달은 이들만 더 깊고 넓은 앎에 이르는 길에 들어설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무지의 자각! 혹은 모름의 앎!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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