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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면 위축과 오만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성찰'

‘나’를 알면 위축과 오만은 없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떻게 위축과 오만을 극복할 수 있을까? 무지의 자각으로 가능하다. 다시 ‘선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선규’는 종종 위축과 오만에 휩싸인다. ‘선규’는 직장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한 없이 위축되고, 직장 일이 잘 풀리면 한 없이 오만해진다. 이는 ‘선규’가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 알뿐,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사달이다. ‘내가 아는 것’(직장과 직장을 다니는 나) 밖에 모르는 ‘선규’가 직장의 성취에 따라 위축되거나 오만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알고,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선규’에게 직장은 세상 그 자체니까.      


 ‘선규’는 위축과 오만을 오가는 삶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 알면 된다. ‘선규’는 무엇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직장 밖의 삶과 그 삶을 살아낼 ‘나’에 관한 앎이다. 그가 무지했던 것들을 진지하게 알려고 할 때 ‘선규’는 위축되지도 오만해지지도 않는다. 직장 밖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있음을 아는 ‘선규’는 직장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크게 위축되지 않을 테다. 또 직장은 여러 삶의 가능성들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일 뿐임 아는 ‘선규’는 직장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크게 오만해지지 않을 테다.



뒷모습은 거울 없이 볼 수 없다.     


하지만 하나의 문제가 더 남아 있다. ‘무지의 자각’은 스스로 이르기 어렵다는 점이다. 무지는 모르는 것이 아닌가? 모르는 것은 애초에 모르는 것이기에 그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가슴에 붙은 먼지는 쉽게 뗄 수 있지만 등에 붙은 먼지를 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먼지를 뗄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먼지가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기 때문 아닌가. 직장생활에 휩쓸려 사는 ‘선규’가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누구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상 사람들과 지난한 대화를 이어갔던 것일 테다. 그 대화를 통해 자신은 볼 수 없는 곳에 먼지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려고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죽었고 우리는 그와 대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를 알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를 조금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소크라테스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등장한다.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자신의 지혜를 확인해 가는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델포이 신전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없다’는 신탁이 나왔다고 한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무척 당황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무지한데, 신은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이들을 찾아 다녀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정치가, 시인, 장인 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대화에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지혜로움을 깨닫게 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와 대화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다른 많은 사람이 그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특히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만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우리 두 사람 모두 대단하고 고상한 무엇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동일하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는 반면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니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롭기는 하구나소크라테스의 변론』 플라톤



철학함만 있다면, 모든 타자는 거울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중심에는 ‘대화’가 있다. 그의 가르침과 배움 모두 ‘대화’를 통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산파술과 반어법의 ‘대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지혜를 가르쳤고, 또한 그 역시 많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혜를 배워나갔다. 이는 소크라테스에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에게 지혜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앎 아닌가? 이런 ‘무지의 자각’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울이 필요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모르는) 곳을 비춰줄 거울. 그 거울이 바로 타자와의 대화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타자들이 있다. 그들과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지의 자각, 즉 ‘내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위축과 오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위축이다. 이는 타자와 대화해보지 않았기에 발생한 위축감이다. 하지만 그는 많은 이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자신의 무지(나보다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구나) 대해 알게 된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위축과 오만함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무지의 자각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위축과 오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 타자가 산파술과 반어법의 대화로 우리에게 지혜를 알려줄 스승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다. 하지만 그런 스승이 없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나와 전혀 다른 삶의 맥락을 지나왔던 타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스승이다.’ 이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따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타자가 스승은 아니지만, 스승의 역할은 할 수 있다. 무지를 자각하게 해줄 스승.


 우리에게 슬픔이 찾아왔다면, 타자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우리의 슬픔은 대개 위축과 오만 때문에 발생하니까 말이다. 돈이 없어서 위축될 때 맑은 눈을 가진 시인을 만나보라. 무지의 자각(돈과 행복은 상관없구나!)으로 위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사업의 성공으로 오만해졌다면 최선을 다하지만 가난한 복서를 만나보라. 무지의 자각(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하는 건 아니구나!)으로 오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철학함!’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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