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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복싱도 삶도 모두 실전이다.

복싱은 겉멋이 아니다.



첫 번째 스파링     

복싱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지 두 달 즈음 되어갈 때다. 그 두 달 동안 나름 열심히 했다. 기본기인 줄넘기부터 쉐도우(거울을 보고 자세를 가다듬는 훈련)는 물론이고 샌드백을 치는 것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 운동을 한 것도 있고, 운동 신경이 전혀 없는 편도 아니어서 복싱 스탭이나 자세는 어느 정도 나왔다. 그래서였는지, 관장은 다음 주에 스파링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운동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실력을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거울에 비친 내 복싱 자세를 보며 뿌듯했다.


 스파링 날이 다가오면서 조금 긴장되기도 했지만, 내심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었다. 첫 스파링에서 상대를 어떻게 요리할지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상상했다. 스파링이 날이 되었다. 상대는 체격은 나보다 작았지만 근육질의 탄탄한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프로테스트(프로복서가 되기 위한 라이선스를 취득하기 위한 테스트)는 통과하지 못했지만, 다른 격투기 프로시합을 뛴 적이 있는 선수였다. 관장이 보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 스파링에서 하기에 적절한 선수로 판단했던 것 같다.



 마우스피스(치아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 장치)를 물고 헤드기어에 14온스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랐다. 여전히 긴장보다는 기대가 컸다. 상대를 어떻게 공격할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공이 울렸다. 공이 울리자마자 상대는 거리를 좁히며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당황한 나는 엉겁결에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주먹이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상대의 체중을 실은 강펀치가 내 얼굴을 정확히 꽂혔다.


 별이 번쩍했다. 그리곤 ‘찌지징’ 광대뼈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동네 싸움에서 경험한 그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기억났다. 그 느낌은 뭐랄까? 통증이 아니라 일종의 공포심에 가까웠다. 스파링을 시작한지 2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손사래를 치며 헤드기어를 벗어버렸다. 아팠기 때문이 아니라 두렵고 또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관장과 상대는 당황한 듯 영문을 몰라 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펀치도 아니고 스파링에서 그 정도 강도의 펀치는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펀치였기 때문이었다.


 스파링을 2분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왔을 때의 그 창피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일반 회원들에게 복싱 좀 한다고 “이건 이렇게 하는 거고요, 저건 저렇게 하는 거예요”라고 떠들었던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했다. 또 프로선수 데뷔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까짓 스파링도 소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링에서 내려온 이후로 한 동안 계속되었다. 창피함, 부끄러움, 자괴감 때문에 도망치듯 서둘러 체육관을 빠져 나왔다. 그리곤 고민에 빠졌다. ‘프로 복서가 되겠다는 꿈은 애초에 너무 무리였던 걸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첫 스파링으로 알 게 된, 두 가지

 스파링 같지도 않은 황당한, 쪽팔린 스파링을 하고 난 이후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내 콤플렉스의 정확한 기원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친구와 싸우다 한 대 맞았을 때, 별이 번쩍하며 광대뼈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이 들 때면 나는 몸이 굳어버리곤 했다. 그것이 승부 순간에 몸이 굳어버리는 내 콤플렉스 ‘실전 공포증’의 기원이었다. 나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복서가 되어야만 했던 게다. 첫 스파링으로 그것을 알게 되었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어찌되었든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하는 내게 이것이 더 중요했다. 그건 바로 ‘겉멋’이었다. 나는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복싱을 겉멋으로 했던 게다. ‘쉐도우는 이렇게 하는 게 멋있지 않을까?’ ‘샌드백은 이렇게 치는 게 멋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복싱을 했다. 나는 그 겉멋이 스파링에서 통할 것이라 생각했던 게다. 하지만 스파링은 실전이다. 보호 장비만 착용했을 뿐, 정말 있는 힘껏 상대와 치고받는다. 그건 진짜 싸움이다. 진짜 싸움에 겉멋은 통하지 않는다.       

     

 아, 젠장 알게 되었다. 그 긴 시간 운동을 했지만 여전히 ‘실전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했던 건 이제껏 운동을 겉멋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겉멋은 실전 앞에 아무런 맥도 추지 못한다. 실전은 자신의 전부 혹은 일부를 걸고 싸워야 하는 진짜 싸움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겉멋 들어 운동을 하고 있었을 뿐, 진짜 싸움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게다. 그래서 부끄럽고 창피하고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첫 스파링을 경험했던 것이다. 첫 스파링이 내게 가르쳐 준 교훈은 이것이었다. “복싱은 겉멋이 아니다!” 



실전은 야박하다. 그런데 삶이 바로 실전이다.

첫 스파링으로 나는 실전이 얼마나 야박한 것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복싱은 실전이다. 그래서 야박하다. 링 위에서는 내가 컨디션이 안 좋다고 봐주거나 살살 때리는 법은 없다.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지 상대는 죽기 살기로 나를 때린다. 바로 이런 야박한 실전이 겁나고 두려워서 복서라는 오랜 꿈을 피해 다녔던 것이다. 어쩌면 긴 시간 겉멋으로 운동을 했던 것은 일종의 비겁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전에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은 되고 싶지만, 막상 실전에 진짜 뛰어들 용기는 없는 그 비겁함. 그 비겁함을 은폐하고자 복싱이나 격투기를 겉멋으로나마 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른일곱에 프로복서라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황당하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전은 링 위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네 삶이 실전이다. 어쩌면 링 위의 싸움보다 우리네 일상적인 삶의 싸움이 더 실전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링 위의 싸움보다 삶의 싸움이 더 야박하다. 링 위에서의 싸움은 적어도 체중을 맞추고 두 팔, 두 다리라는 같은 조건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우리네 일상적 삶은 어떤가? 막무가내로 업무지시를 하는 사장, 폭언을 밥 먹는 듯 하는 상사, 진상을 부리는 고객, 온갖 범법을 저지르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유명인사들. 



 그들은 우리의 밥줄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권력이 있다는 이유로, 돈이 많다는 이유로, 일상적인 우리네 일상적인 삶을 유린한다. 최소한의 공정함도 없는 야박한 싸움에 우리는 매일 내몰리고 있다. 부모의 강압적 훈육에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수의 부당한 요구에 할 말을 하지 못했다. 직장 상사의 부당한 업무 지시에 할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상황이 내게 일어날 때마다 몸이 굳어버렸다. 그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악착같이 복서가 되고 싶다. 그건 오래 묻혀 둔 꿈을 이루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제 야박한 실전에서 물러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링 위에서든 삶에서든.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당당하게 할 말은 하고, 싸워야 한다면 피하지 않고 싸우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그 싸움의 시작을 링 위에서 시작하고 싶다. ‘실전 공포증’이라는 내 콤플렉스의 시작이 바로 상대와 치고받는 것의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 실전은 야박하다. 그런데 삶이 바로 실전이다. 그 실전에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비겁하고 창피하게 2분도 채 안 되어 헤드기어를 벗어던지고 도망치는 삶만은 극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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