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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이데아'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 너머

모든 강박은 완벽에 대한 강박이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떻게 강박적인 마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강박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심하게 압박을 느끼는 마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이다. 그 ‘어떤 생각’은 무엇일까? 바로 완벽함이다. 모든 강박은 완벽함에 대한 강박이다. 다종다양한 강박이 있지만, 이는 모두 근본적으로 완벽함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시작된다. 결벽증이나 정리벽도 마찬가지다. 그런 강박적인 마음은 모두 완벽(완벽한 청결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온다.


 강박적인 이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 불안은 깊은 무의식속에 자리 잡은 완벽함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강박적인 마음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다. 강박적인 이들은 강박으로 인한 불안만 응시할 뿐, 그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완벽에 대한 집착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다. 완벽함에 대한 집착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에 있으니까 말이다. 강박은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 더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완벽함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집착하고 있는 마음 상태.

    

 플라톤 이후 20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플라톤의 세계가 산다. 강박적인 마음에 시달리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강박은 완벽함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그 완벽함이 바로 이데아 아닌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완벽하고 완전한 이데아. 강박에 시달리는 이들은 바로 이 이데아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청결함의 이데아, 정리정돈의 이데아 등등 현실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 저마다의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니 강박적인 마음을 극복하려면 이데아를 극복해야 한다.      



이데아는 어디 있을까?     


이 이데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먼저 이데아 어디에 있는지 부터 알아보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플라톤의 이데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논증은 단지 같음만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 선함 자체, 옳음 자체에 해당되는 것이라네. 그러니 이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네. 파이돈플라톤


 플라톤은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데아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의 세계다. (영혼이 몸에 들어오는 것이 태어남이다.) 즉, 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 그 자체로’로 가득 찬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영혼은 이미 이데아를 알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흔히 사람들이 “아름답다” “인간답다” “삼각형 같다” “통나무 같다”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한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사람들이 이미 ‘이데아’(아름다움‧인간‧삼각형‧통나무 그 자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논증한다.



 이데아의 세계는 육체를 가지고 갈 수 없는 세계다. 쉽게 말해, 이데아는 이승이 아닌 저승에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다.” 플라톤이 죽음을 찬양하며 했던 말이다. 이는 플라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데아의 세계는 순수한 영혼만이 되돌아갈 수 있는 세계 아닌가. 이는 죽음을 통해서만 신체를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강박적인 마음이 심한 이들이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밴 우울에 쉽사리 빠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완벽하고 완전한 세계는 살아 숨쉬는 이승에서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타자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세계는 아무리 씻어도 아무 정리정돈을 해도, 완전하고 완벽한 청결‧정돈의 세계에는 결코 도달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강박적인 이들이 자꾸만 죽음의 냄새에 이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강박적인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방법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이 사는 현실세계에 이데아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강박 자체가 완벽함(이데아)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런 이데아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강박적인 마음도 사라진다. 때로 이론적인 답은 공허하다. “이데아(완벽함)는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 이런 말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강박이었다면, 애초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테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없을 뿐, ‘이데아’는 있다.


분명 플라톤의 '이데아'는 없다. 이승과 저승 같은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를 논증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생각해보자. 즉 아름다움 ‘그 자체’는 있을까?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그 모든 아름다움을 존재하게 하는 고정불변의 단 하나의 원본으로서의 아름다움 ‘그 자체’는 없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는 없다. 하지만 의아하다. 우리는 분명 아름다움 ‘그 자체’를 느끼지 않는가? 그래서 꽃도 그림도 여인도 모두 아름답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름다움 ‘그 자체’(이데아)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후적인 것이다. 즉,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꽃‧그림‧연인 등등을 인식한 후에 형성된 관념이다. 아름다움 ‘그 자체’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고정불변의 유일한 플라톤의 이데아가 아니다. 이데아는 언제나 사후적이기 때문에 유동적이며 다수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꽃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또 100년 전의 미인이 지금은 추녀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복사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고정불변의 단 하나뿐인 ‘이데아’가 없을 뿐, 각가지 아름다운 대상들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있다.



‘지금, 나’의 ‘이데아’를 찾아서


여기에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완벽함(이데아)은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 이런 다그침은 강박의 극복은커녕 강박을 더 강화할 뿐이다. 인간은 언제나 금지된 것을 더 욕망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완벽함(이데아)에 대한 집착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데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을 뿐, 사후적 ‘이데아’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완벽함에 대한 질문을 바꾸는 편이 더 지혜롭다.


 “완벽한 청결(혹은 정리정돈)은 무엇인가?”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갇힌 질문이다. 이런 질문으로는 강박으로부터 한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완벽함)을 쫒느라 끝도 없는 불안과 우울에 빠져 들게 될 테니까.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나에게 완벽한 청결(혹은 정리정돈)은 무엇인가?” 이것이 지혜로운 질문이다. 완벽함(이데아)이란 것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질문하면 어떻게 답하게 될까?


  ‘안 피곤할 때는 한 명과 악수하고 손 씻고 샤워는 한 시간, 피곤할 때는 세 명과 악수하고 손 씻고, 샤워는 20분하는 것이다.’ 또는 ‘혼자 있을 때는 물건의 위치와 순서를 모두 맞춰 정리하는 것이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물건의 위치만 맞춰 정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답할 수 있다면,  이제 조금 덜 강박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 완벽함의 집착이 아니라, 완벽함의 지향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너'도 조금 더 기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데아(완벽함)을 제거하려 하지 말고, ‘지금, 나’의 이데아(완벽함)를 찾아나가면 된다. 그때 우리는 강박으로부터 한 걸음씩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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