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어디서 출발하는가? 지식인가? 즉 많이 배우면 지혜로워지는가? 아니다. 많이 배운 이들 중 어리석은 이들이 어디 한 둘 이던가. 지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의식 과잉의 동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누구나 지혜롭기를 바라지만 아무나 지혜로워지지 못하는 이유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의식 과잉 상태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기 어렵다.
이것은 거창한 이론 없이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이가 자신에게 피해를 준 일은 크고 많게 기억한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준 피해는 작고 적게 기억한다. 아니 그런 일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다. 상처를 받은 ‘나’와 상처를 준 ‘나’를 동등하게 파악하는 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것이다. 그렇다. 지혜는 ‘자의식 과잉’을 너머 ‘자기 객관화’에 이를 때 비로소 시작된다.
“너 자신을 알라!” 서양 철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자기 객관화'에 이르지 못하면, 지혜sophia를 사랑philos하는 일(philosophy)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2000년 전에 이미 단언했던 셈이다. 어떻게 ‘자의식 과잉’을 넘어 ‘자기 객관화’에 이를 수 있을까? 원론적인 답은 ‘자기성찰’이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객관화'에 이를 수 있다. 원론적인 답은 때로 이토록 순진하다. 이런 순진함은 인간의 자의식 과잉을 너무 쉽게 본 결과다.
인간의 자의식 과잉은 무의식의 영역까지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 흔히 자기성찰을 한다고 믿지만 이는 자의식 과잉의 상태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경우는 흔하다. “오늘 회식입니다.” 팀장의 말을 생각해보자. 이것이 전형적인 자의식 과잉 상태 안에서의 자기성찰이다. 팀장의 말은 분명 자기성찰의 결과다. 요즘 일이 많아서 팀원들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자의식 과잉 안에서의 자기성찰이다.
팀장 자신이 힘들 때 술을 마시며 회식하고 싶었기 때문에 팀원들도 그럴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팀원들의 짜증과 절망이 섞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던 건, 팀장의 자의식 과잉 때문이다. 자의식 과잉은 자기성찰마저 쉽게 집어 삼킨다. 자의식 과잉이 이토록 무섭다. 흔한 자기성찰로는 지혜의 시작인, 자기객관화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자의식 과잉에 포섭된 자기성찰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그 현실적 대안은 ‘평균’이다. 물론 사회과학적인 '평균'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아니 때로 그것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루 평균 568.41명 사망! 이것이 한 사람의 죽음과 남겨진 이들의 슬픔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준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차가운 통계적 '평균'라 하더라도 나름의 쓸모가 있다. 다시 '회식 참사'를 일으킨 팀장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팀장이 어설픈 자기성찰 대신 '평균'을 찾아봤다면 어땠을까?
인터넷을 뒤져 ‘직장인 회식 선호도 평균’을 찾아봤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주변 동료들에게 회식이 즐거운지 짜증나는지 물어보면서 나름의 ‘평균’을 찾아보려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팀장만 즐겁고 모두 불행한 ‘회식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평균은 비교적 손쉽게 자의식 과잉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준다. 그것이 평균의 힘이다.
‘자의식 과잉’을 넘어 ‘자기 객관화’에 도달할 수 있는 '자기성찰'은 그 자체로 이미 지혜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이나 제대로 된 자기성찰은 드물고 어렵다. 그러니 지혜를 바란다면, 어설프게 '자기성찰'대신 '평균의 힘'을 빌리는 편이 낫다. 지혜는 궁극적으로 ‘나’가 아니라, ‘너’로부터 온다. 그러니 '평균'은 때로 지혜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평균은 타자의 집합이니까. '자의식 과잉'에 빠진 줄도 모른 채로 허우적 대고 있는 이들을 위해, 소크라테스의 전언은 당분간 이렇게 바꾸는 편이 좋겠다. "너 주변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