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원인론’
강제되기를 바라는 마음
‘퍼스널 트레이너(PT)’라는 직업이 있다. 전문 지식을 활용해서 개별적으로 운동을 지도해주는 일을 한다. 이 PT는 어느 순간 유행처럼 번졌다. 이제는 헬스장에 가서 PT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PT를 만나기 위해 헬스장에 가아야 할 만큼 PT는 대중화되었다. PT는 왜 이렇게 유행하게 된 걸까?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섹시한 외모를 원해서? 정확한 운동방법을 알고 싶어서?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이 없지만, 이는 모두 피상적인 이유일 뿐이다.
본질적인 이유는 뭘까? 운동하고 싶지 않아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PT를 찾는 이유는 강제로 운동을 시켜주기를 바라서다. 운동 방법이나 식단조절 같은 것은 예외적이거나 부차적인 이유다. PT만 그럴까? 많은 이들에게 강제되기를 바라는 은근한 마음이 있다. 어느 정도 여윳돈을 마련해놓고 퇴사를 했지만 이내 다시 직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흔하다. 또 혼자 읽어도 되는 책을 함께 모여 읽는 모임에 참석하는 이도 많다. 이는 모두 강제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강제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기력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 존재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종종 자발적으로 강제(부자유)되기를 바라는 걸까? 바로 무기력 때문이다. PT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이 너무 쉽게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윳돈이 있지만 황급히 직장을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직장이 없을 때 급격히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함께 책 읽는 모임도 마찬가지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함께 읽는 강제성으로 무기력한 자신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그 무기력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무기력이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할 힘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에 머무는 것 아닌가. 이런 무기력은 죽음의 냄새를 품고 있다. 무기력의 극한 상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이들은 이 무기력을 방치할 수 없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인 자유마저 쉽사리 포기하는 이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기력을 피하기 위하기 위해 부자유(강요‧강제)한 삶을 이어가야 할까? 아니면 무기력한 상태로 죽음의 냄새가 자욱한 자유를 누려야 할까? 섣불리 답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문제들이 바로 무기력에서부터 시작된 것 아닌가? 그러니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해야 한다. “왜 무기력해지는 걸까요?”
플라톤 ‘원인론aitiology’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플라톤의 ‘원인론’에서 찾을 수 있다. ‘원인론’이 무엇일까? 사물이나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을 찾으려는 이론이다. ‘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눈은 어떻게 내리게 되는가?’ ‘고양이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더 나아가 ‘지구와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이론이 ‘원인론’이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이 저마다의 ‘원인론’을 주장했고, 이는 플라톤에 이르러 본격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다. 플라톤의 ‘원인론’은 무엇일까?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이 없이는 생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demiourgos’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며, 이런 것을 본本, paradeigma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든 것이 그 형태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또한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된다. 『티마이오스』 플라톤
플라톤의 말처럼, “생성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되게 마련이다. 플라톤은 어떤 대상이든 그것이 발생하려면 세 가지 원인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제작자demiourgos’, ‘형상eidos’, ‘질료hyle’가 바로 그것이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집을 만든다고 해보자. 거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필요하다. 먼저 집을 제작할 ‘건축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집을 지을 것인지에 대한 ‘설계도’가 필요하다. 또 설계도에 맞춰 집을 지을 ‘재료’(시멘트, 흙, 나무 등등)도 필요하다.
여기서 건축가는 ‘제작자’, 설계도는 ‘형상’, 재료는 ‘질료’에 해당한다. 건축가, 설계도, 재료가 있어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세계(우주) 역시 “만드는 이”인 ‘제작자’,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으로서의 본이 되는 ‘형상’ 그리고 재료인 ‘질료’가 있어야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플라톤의 ‘원인론’이다. 이 세 가지 원인 중 ‘형상’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가(제작자)라고 여긴다. 재료(질료)는 흔한 것이고, 설계도(형상)는 건축가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이어서 가장 중요한 원인, ‘형상eidos’
하지만 플라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제작자’는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제작자’는 ‘형상’과 ‘질료’를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형상eidos’이다. 이 ‘형상eidos’이 바로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긴 ‘이데아idea’와 같은 것이다. 플라톤은 ‘형상’(이데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신적이고, 영원하며, (감각이 아닌) 지성으로 알 수 있고, 분리나 해체가 불가능하며, 언제나 자신의 원래 동일한 상태로 있는 것. 『파이돈』 플라톤
플라톤에 따르면, ‘형상’(이데아)은 신적이고 영원하며, 분리‧해체 불가능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고 만지는 등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오직 지성(예지)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형상’은 가장 근본적이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이런 ‘형상’의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은 ‘건축가’(제작자)가 ‘설계도’(형상)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설계도’(형상‧이데아)가 건축가(제작자)를 만든다고 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