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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체'의 세상에 무기력은 없다.

'플라톤'적 세계를 넘어 '들뢰즈'적 세계로

무기력은 세계관의 문제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는 왜 무기력해지는 걸까? 흔히 사람들은 무기력의 원인을 신체에서 찾으려고 한다. 쉽게 말해서 몸이 약해서 무기력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몸이 약하면 무기력할 개연성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약한 신체가 무기력의 원인은 아니다. 힘이 넘치는 강한 신체를 가진 이가 어느 순간 극심한 무기력의 상태에 빠지는 일은 흔하다. 또 반대의 경우, 즉 약한 신체를 가졌지만 활력 넘치는 삶을 이어가는 경우도 흔하다. 이처럼, 무기력의 원인은 신체적 상태가 아니다.


 무기력의 근본적 원인은 세계관이다. ‘내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따라 무기력한 삶과 활력적인 삶이 결정된다. 종종 무기력해진다면 자신의 신체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야 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원인론’이 문제가 된다. 플라톤의 ‘원인론’은 하나의 세계관이다. 어떤 세계관인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의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플라톤에게 중요한 건, ‘제작자’도, ‘질료’도 아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기에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형상’이다. 이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이건, 세계 전체이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무기력의 원인, ‘플라톤’적 세계관


이런 ‘플라톤’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의 의미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는 이에게 생기 넘치는 활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어떤 일이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할 필요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플라톤적 세계관’에서 사랑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운명(형상)적 사랑이다. 내(제작자)가 누군가(질료)를 만나 어떤 사랑을 하게 될지는 운명(형상) 안에서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이런 ‘플라톤’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활력이 있을 리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들에게 운명적 사랑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러니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해나갈 수 있는 활력은 애초에 필요치 않다. ‘플라톤’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세상 밖으로 나가기보다 무기력하게 운명적 사랑을 기다릴 뿐이다. 이들의 유일한 활력은 숨겨진 사랑의 형상(운명)을 발견하기 위해 교회나 점집을 향할 때 잠시 꿈틀거릴 뿐이다. 하지만 이런 퇴행적 활력은 이내 더 큰 무기력으로 되돌아 온다.


 우리는 왜 무기력해지는 걸까? 이제 답할 수 있다. 종종 무기력에 빠진다면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플라톤’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의 의미는 세상 너머에 있는 ‘형상’(이데아)에 의해 이미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플라톤’적 세계관. 우리의 무기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플라톤’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만큼 무기력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활력 넘치는 삶을 위한 ‘들뢰즈’적 세계관


어떻게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간명하다. ‘플라톤’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면 된다. 이 간명한 답은 결코 쉽지 않다. 2000여 넘게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이 ‘플라톤’적 세계관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명실공히 현대 서양철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질 들뢰즈’를 만나 볼 시간이다. 그는 ‘형상’ 혹은 ‘이데아’로 상징되는 ‘플라톤’적 세계관은 삶의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어디에서 출발하는가어디를 향해 가는가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백지상태를 가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이 모든 것들은 여행이나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들뢰즈는 이런 질문은 쓸데없다고 말한다. 이는 플라톤을 향한 날선 비판이다. 플라톤의 ‘형상’(이데아)이 바로 세상만물의 출발점(시작‧기초)이자, 그것들이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것 아닌가. 또한 들뢰즈는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즉 ‘형상’(이데아)을 찾는 것은 삶(여행이나 움직임)의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말이라고 진단한다. 들뢰즈는 ‘플라톤’적 세계관의 중심인 ‘형상’(이데아)을 해체했다. ‘플라톤’적 세계관을 넘어선 들뢰즈는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다양체multiplicity로서의 세상


플라톤이 세상만물을 세 가지 원인(제작자‧형상‧질료)의 결과물로 본다면, 들뢰즈는 세상만물을 ‘다양체multiplicity’로 본다. 다시 집을 예로 들어보자. 집은 ‘건축가’와 ‘설계도’와 ‘재료’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어느 ‘건축가’가 자신의 ‘설계도’를 따라 집을 지었다고 해보자. 그 ‘건축가’ 그린 ‘설계도’는 그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낳았기에 생성된 것이다. 또 그 집을 지을 때 우발적인 날씨 변화에 의해 ‘재료’들은 미세한 영향을 받았을 테다.


 만약 그 ‘건축가’가 그 여인과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설계도’는 존재할 수 없다. 또 집을 지을 때 그 날씨가 아니었다면 그 ‘재료’는 그 재료가 아니었을 테다. 그 모든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마주침이 없었다면 그 집은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집은 세 가지 원인이 아니라, 그 세 가지 원인을 원인되게 하는 무수히 많은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다. 들뢰즈는 집뿐만 아니라 세계(우주) 전체 역시 이런 수많은 우발적 사건의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체’라고 보았다.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된다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들뢰즈의 난해한 이야기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세상만물은 모두 ‘다양체’이고, 그것들은 연결접속(마주침)이 일어날 때마다 본성(본질)이 변하게 된다. ‘사랑’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10대의 사랑, 20대의 사랑, 30대의 사랑, 혹은 40‧50대의 사랑은 다 다르다. 그것은 ‘사랑’이 바로 ‘다중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두 사람이 각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그 두 사람이 어떤 조건과 어떤 상황에서 만났는지에 따라 ‘사랑’은 본성의 변화를 겪게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다. 이미 존재하는 그래서 결코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갖고 있는 운명(형상‧이데아)적 사랑 같은 건 없다.  


   

모든 것은 ‘형상(이데아)’의 결과가 아니라, ‘지층화’의 결과다.     

우리는 의미화하지도 의미화되지도 않는다우리는 지층화된다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들뢰즈는 “우리는 의미화하지도 의미화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의미화’는 ‘형상(이데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 ‘형상’을 만들지도 않고, ‘형상’화되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운명(형상)적 사랑을 만들지도 않고, 그런 운명(형상)적 사랑에 포획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층화”될 뿐이다. ‘지층화’가 무엇인가? 우발적인 마주침에 의해 지층이 수없이 쌓이고 이러 저리 휘어지고 끊어지는(습곡‧단층작용) 과정이다. 이런 ‘지층화’(마주침)에 의해 지구가 형성되듯, 우리 역시 그렇게 ‘지층화’된다.      


 우리의 사랑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수없는 우연적 만남, 그리고 우발적인 흔들림에 의해 ‘지층화’되는 것, 그렇게 끊임없는 사랑의 본성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닌가. ‘플라톤’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은 ‘사랑의 의미’를 찾느라 ‘사랑의 기쁨’을 놓치고 만다. 그렇게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들뢰즈’적 세계관을 세상을 보는 이들은 다르다. 이들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사람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게 되거나, 하다못해 친구에게 소개팅을 해달라고 조르기라도 할 테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의 기쁨’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활력적인 이들이 된다.      


 ‘들뢰즈’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은 유쾌하고 활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정해져 있는 삶의 의미 같은 것은 없고,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서 삶의 의미가 구성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오늘’과 ‘내일’은 주어진 ‘형상’(운명)을 발견해야 할 퇴행적이어서 우울한 시간이 아니다. ‘어제’와 다른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새로운 ‘지층’(마주침)을 형성할 기쁘고 유쾌한 시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정해진 의미는 없다는 것. 대상의 의미는 오직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무기력을 벗어나 활력 넘치는 삶을 원한다면, 과감하게 ‘들뢰즈’의 세계로 들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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