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받을 때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고통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하지만 나는 종종 그러지 않는다. 나는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 없이 가벼운 삶만 살아낸 이들이 있다. 그들은 고통을 홀로 견뎌야 할 필요도 이유도 모르기에 그것을 견디는 법도 모른다. 그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그들에게 고통을 말하지 않는 이들은,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조금 더 무거운 삶을 살아낸 이들은 나를 의아해한다. “너는 왜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지?”
나는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 고통을 말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짐을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통을 말하며 삶의 고통이 덜어질 때, 그 고통만큼 타인의 어깨는 무거워진다. 내가 아프다고 지른 비명은 누군가에게 특히나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짐이 된다. 그러고 싶지 않다. 내 삶의 무게 정도는 내가 짊어지고 가고 싶다. 불교의 가르침처럼, “온 세계가 불타는 집火宅이요, 삶은 고통의 바다苦海”아닌가. 그러니 타인의 고통을 짊어지는 못할지언정 내 고통 하나 스스로 짊어지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가.
나는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 고통을 넘어서고 싶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진 고통은 삶을 정체 시킨다. 사랑은 아픈 일이다. 사랑이 아프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사랑은 늘 그 자리다. 삶도 그렇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삶이 아프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의 삶은 늘 그 자리다. 쉽게 말해진 고통은 응축되지 못하기에 그의 사랑도 삶도 늘 자리에서 늘 멈춰 선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늘 아팠던 자리에 멈춰 서서 삶을 정체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살아있고 싶기 때문이다. 멈춰진 삶은 죽음이지 삶이 아니지 않은가.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고통은 삶의 반증이다. 살아있기에 아픈 것이고, 아프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을 넘어선다는 것은 고통을 넘어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통을 넘어서는 것은 고통으로만 가능하다. 고통을 말하지 않음으로서 응축된 고통. 그 고통스러운 고통을 통해 고통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아프지 않고 살아낼 방법이 없듯이 더 아프지 않고 더 잘 살아낼 방법도 없다. 이것이 강건한 이들이 더 잘 살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아픔을 눌러 담고 또 눌러 담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저 가만히 아플 테다.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지 않음으로 고통을 응축시켜 아플 테다. 그렇게 나의 고통을 넘어 내가 사랑하는 이의 작은 고통이라도 나눠 짊어질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사랑과 삶을 이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