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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방패

성찰이란 무엇인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이다. 삶에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성찰하는 이들만이 어제보다 더 강건해져서 더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찰은 늘 좋은 것일까? 아니다. 성찰은 어쩔 수없이 스스로 연약해지는 일인 까닭이다. 성찰은 등껍질처럼 들러붙어 있는 겹겹의 페르소나를 뜯어내어 그 속에 있는 연약한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성찰하지 않으려는 이유다. 세상 사람들은 등껍질 같은 가면을 덮어쓰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질주하려 할 뿐, 성찰하지 않는다. 연약해진 자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까.      


 성찰은 중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성찰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기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지만 동시에 스스로 연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좁혀지지 않는 두 간극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성찰의 방패'가 필요하다. 이 방패는 무엇을 막는 방패일까? 성찰 그 자체를 막는 방패가 아니다 성찰의 위험성은 성찰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자기성찰로 인해 발생한 연약함은 외부원인이 없다면 스스로 치유가능하다. 성찰의 강건함은 연약함-치유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다.


 성찰의 위험성은 어디 있는가?  성찰의 위험성은 정확히 타자의 위험성이다. 성찰로 연약해진 상태에서 특정한 타자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더 강건해지기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니 성찰의 방패는 타자를 막는 방패다. 그 타자는 어떤 타자일까? 성찰을 공격하는 타자와 성찰을 이용하는 타자이다. 성찰의 방패는 성찰을 공격하거나 이용하는 타자를 막는 방패다. 이 타자들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먼저 성찰을 공격하는 타자는 어떤 타자일까?


“저번에 상처 주었던 이야기는 내 잘못이었어. 내 피해의식 때문에 그렇게 말했어.”
“이제 알았어? 너는 항상 그게 문제야.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깊은 성찰은 반드시 행동을 촉구한다. 진정으로 삶을 되돌아 본 이후에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행동(예컨데 반성‧사과) 앞에 어떤 타자들은 약점을 잡은 것처럼 공격하곤 한다. 그때 성찰했던 이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등껍질을 벗어두고 연약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가 몇 번 반복되면 성찰은 무의미한 것을 넘어 하면 손해인 것으로 치부되게 된다. 그렇게 성찰 없는 삶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성찰을 이용하는 타자들은 어떤 이들일까?    

  

“내가 너무 자본주의적으로 살았던 것 같아. 앞으로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어.”
“그래? 그럼 이제 밥값은 네가 계산해”     


 성찰은 다른 삶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그때 누군가는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 깊은 성찰로 인해 변한 누군가의 삶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데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다. 자본주의적 삶을 성찰한 이를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바라거나, 이기적인 삶을 성찰한 이를 이용해 자신의 이기심을 관철하려는 이들은 얼마나 흔하던가. 이렇게 이용당한 성찰은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그런 상처가 몇 번 반복되면 성찰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증폭시키는 일이 된다. 그렇게 성찰 없는 삶에 이르게 된다.


 성찰의 방패는 우리의 성찰을 공격하는 이들과 이용하려는 이들을 멀리 하는 것이다. 아직 충분히 강건해지지 못했다면, 성찰의 방패로 우리의 성찰을 공격하는 혹은 이용하는 남루한 인간들을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성찰을 무의미한 것으로, 손해 보는 짓으로, 인간에 대한 환멸의 증폭시키는 일로 여기게 될 수밖에 없다. 그때 우리는 성찰을 부정하게 된다. 그렇게 더 강건해져서 더 기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성찰의 방패'(타자의 제거)가 필요한 궁극적인 이유는 '성찰의 방패'를 버리기 위해서다. 당연하다. '성찰의 방패'는 성찰을 위해 필요한 것 아닌가. 우리의 성찰이 끝내 가닿아야 할 곳은 '타자의 제거'가 아니라 '타자의 사랑'이다.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잠시 타자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성찰의 방패'를 타자 제거를 위한 정당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바로 내가 누군가의 성찰을 공격하거나 이용하려는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성찰적 도구(성찰의 창!)로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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