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인 삶은 후회하지 않는 삶이다. 그런 삶은,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후회할줄 알면서도 하는 삶이다.
그녀의 소식을 잘 모른다. 오랜만에 연락한 이에게 그녀가 복통으로 쓰려져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며 내리 일주일을 병원 신세를 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마음이 무겁다. 마음이 왜 무거운가? 그녀를 사랑해서인가? 아니다. 부재의 고통이 사랑이라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하지 않을 때 고통보다 편안함을 느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마음이 무거운가? 그녀가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을지에 대한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녀보다 긴 시간 애정을 쏟으며 나를 보살펴준 사람은 없다. 누가 뭐래도 그녀를 나를 사랑해주었다. 나 또한 그녀와 안 좋은 일만 있었겠는가. 그녀가 내게 주었던 가슴 저미게 기뻤던 순간들은 여전히 내게 또렷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애틋함이 지금 내 마음에 눌러앉은 무게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 그 무게의 3할이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나머지 7할은 나에 대한 것이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후회하게 될까, 뒤 늦게 찾아올지도 모르는 애통함에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한 사람의 진실된 존재감은 그 사람이 오롯이 떠난 이후에만 알게 된다. 지금 내가 그녀의 자리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봐 두렵다. 그리고 때늦게 그 빈자리를 알게 되어 후회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것이 다 일까?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찾아올지도 모르는 뒤늦은 애통함에 두려움. 그것이 지금 내 마음을 누르고 있는 7할의 무게일까? 석연치 않다. '철학'하며 산다. 그것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산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어쩌면 나는 뒤늦은 애통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고민하고 사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이가 그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애증의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늘 두 선택지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찾아올지 모르는 애통함을 감당하며 나아갈 것이냐? 그 불확실한 애통함을 피하고자 서로 상처 주는 시간을 함께 할 것이냐? 나의 ‘철학’은 언제나 같은 답을 했다. 지금의 기쁨을 쫒으며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애통함을 감당하라! 두 선택지 앞에서 답하며 늘 기도를 하듯 중얼거렸다. “안다. 다 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그래, 그래도 할 수 없다. 뒤늦은 애통함이 찾아오더라도 그것마저 감당할 수밖에. 나는 나의 철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왜 마음이 무거워졌는지 알겠다. 7할의 무게를 알겠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후회할 일보다 나의 '철학'이 상처 입을까봐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구나. 이제 그녀보다 '철학'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구나. 내게 이제 남은 것은 '철학'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구나. 그리고 그녀보다 '철학'을 더 사랑하게 되었듯, 언젠가는 그 '철학'마저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구나. 야박하게도, 지금 나의 '철학'은 그 모든 무거움을 가슴에 지고 나아가라고 말한다.